꼬리를 삼킨 뱀

by 이새하





얼마 전까지 내 집에 얹혀살던 막내 동생은 집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걸핏하면 동물들을 데려왔다(얹혀사는 주제에!). 그런 식으로 함께 살게 된 동물들 중에는 보더콜리, 앵무새, 토끼 그리고 뱀도 있었다. 이름처럼 연한 크림색과 노란색의 비늘에 석류알같은 눈을 가진 이 버터 콘 스네이크는 허물벗기를 할 때마다 점점 자라더니 내 팔을 다섯 번은 감을 정도로 길어졌다.
옛날 사람들은 자라면서 주기적으로 오래된 껍질을 벗어버리는 이 탈피 행동을 부활 혹은 재탄생과 동일시했다. 그래서 뱀은 시간을 거슬러 다시 새로워지는 존재이자, 영원한 청춘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스 신화 속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 뱀이 감겨 있는 까닭도 이러한 치유와 재생의 이미지에서 연유한다.
고대 이집트를 포함해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우로보로스(ουροβóρος) 역시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시작이 곧 끝이며, 끝이 또 다른 시작이 되는 ‘영원한 순환’을 의미하기 때문에 완전함, 자기 완결성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우로보로스의 은유에 빗대어 이 시대의 환부를 읽어내면, 우리가 잃어버린 고리들이 무엇인지 조금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피지컬 리터러시 교육은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 선순환 구조를 이루고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는 계열성의 유실, 둘째는 계속성의 유실, 마지막은 통합성의 유실이다.

먼저 생애 주기 차원에서 아동기–청소년기–성인기로 이어져야 할 계열성이 현장에서는 아직까지 충분히 구축되어 있지 않다. 문서 수준 교육과정의 목표와 달리 발달 단계에 따른 체계적 신체 경험은 단편적으로만 제공되며 고등학교의 체육 시간은 입시 중심 교육 속에서 주변화되어 그 결과 초기 경험이 이후의 삶으로 확장되지 못한 채 남아있게 된다.
다음으로 학습의 공간 차원에서 가정–학교–사회로 이어져야 할 계속성 역시 단절되어 있다. 학교에서의 신체활동은 가정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지역사회와의 연결도 느슨하다. 일상 속 신체활동은 교육과 분리된 채 개인의 선택으로 방치되며 지속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제도적 차원에서 학교체육–생활체육–전문체육으로 이어져야 할 통합성 또한 파편화되어 있다. 학교체육은 기초 경험에 머물고, 생활체육은 여가로, 전문체육은 엘리트 양성으로 분절되면서 서로 유기적으로 환원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기실 가장 큰 문제는 각 차원에서의 유실이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복합적으로 교착되어 있다는 데 있다. 각각의 영역이 아무리 발전한다 한들 제각기 떨어져 이어지지 못한다면, 설령 이어지더라도 원인과 결과의 이음매가 다시 하나로 맞물리지 못한다면 우리가 바라는 되먹임 구조는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잃어버린 인과율의 고리들을 찾아 처음과 끝을 연결할 방법이다. 이를 위한 노력들은 때로 겨울 강의 얼음 위로 돌을 던지는 일 만큼이나 막막하게 느껴진다.


내가 몇 번이나 관찰해 보았는데, 동생의 뱀은 냉동 생쥐를 먹을 뿐 자기 꼬리를 먹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례가 스트레스로 인한 이상행동으로 일부 보고되기도 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소화시키며 죽음에 이른다고 한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는 자기완결성은 어쩌면 신화적 상상력 속에서나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자양분으로 삼아 끊임없이 재생하는 완전한 순환은 정말 현실에선 불가능한 것일까? 오늘날 ‘생애 전반에 걸친 의미 있는 신체 경험’이 개개인의 여정을 넘어 다시 사회 전체의 피지컬 리터러시적 토대로 회귀하는 구조는 하나의 이상에 불과한지 물어야 한다.


결국 피지컬 리터러시 교육의 당면 과제는 지금 여기에 없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다. 더 많은 정책과 예산, 프로그램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지만 단절된 지점들을 연결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각 영역이 내부로부터의 자생력을 가질 수 있도록 부족한 계열성을 보완하고, 단절된 계속성을 이어가며, 분리된 영역들을 다시 모으는 과정을 통해 사회 전반의 순환적 성장구조에 한 걸음 가까워지리라 믿는다.



202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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