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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Aug 11. 2024

한국의 미래에는 맑스가 없다.

서울대 경제학부, 올 가을 학기부터 맑스 경제학 수업 미개설

 핸드폰을 하다가 충격적인 기사 제목을 보았다. 한겨레에서 「서울대, 마르크스 경제학 명맥 끊나…입문 수업마저 개설 안 해」라는 기사를 내놓은 것이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53222.html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울대 경제학부에서는 본래 마르크스를 주제로 한 전공수업이 세 개 존재하였다. 본래 맑스를 전공했던 김수행 교수가 은퇴한 후, 남은 수업들은 정식 교수가 아니라 강사들이 맡아오며 사실상 큰 투자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작년부터 차례차례 과목이 하나하나 수강편람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으며 올 가을 학기에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강의 마저 사라졌다.


 서울대의 경제학부장은 한겨레에게 이는 부족한 자원을 학생의 수요에 따라 배정한 것이라고 밝혔으며, 차후 학생들의 수요변화에 따라 다시 개설 될 수 있다는 말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대학생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주류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들에게 맑스가 배제된 것이 아닐까?라는 지적 역시 있었다.


 필자는 이 뉴스를 보고 꽤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씁쓸한 심정으로 글을 쓰고 있다. 물론 마르크스를 주제로 한 과목이 세 개나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를 아예 배우지 않는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필자는 여기에 여러 이유를 댈 수 있다.


 학문 발전의 본질은 지식의 확장이 아니다. 오히려 관점의 진화가 바로 학문의 발전이다. 지식의 확장이란 단지 더 폭넓고 깊은 관점을 위한 준비물일 뿐이다. 그리고 이 관점의 진화을 위해서는 서로 다른 관점과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싸움 역시 필요하다. 철학이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결이듯 말이다 경제학을 거칠게 나누면 결국 주류경제학과 비주류경제학, 케인스주의와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따위를 포괄하는 자유주의와 맑스에서 시작된 사회-공산주의 계열로 나눌 수 있다. 경제학도 결국 학문인 이상 학계에 다양한 관점을 지닌 학자들이 포진해있어야한다. 그들이 서로 비판하고 논쟁하는 과정에서 논리가 발전하고 더 나은 방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맑스에 대해 배우지 않는 다는 것은 결국 학생들의 학문적 성취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또 다수의 학생의 수요만을 따라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학설을 배우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좋은 교육’과 ‘학생들의 선호’는 항상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인 서울대학교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이 특히 유감스럽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려면 관악을 보라던데, 관악의 경제학도들이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 재반박을 하지 못할 미래가 온다면 우리는 어디를 봐야할까? 신촌이나 안암?


 필자는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배우지 않는다는 사건의 내적 문제만이 아니라, 외적인 문제 역시 짚어보고 싶다.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단순히 학생의 수요만으로 주요 학설을 가르치지 않는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 좋은 교육, 더 옳은 교육을 위해 학교는 의무감과 소신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은가? 또 그저 다수결에 의거해 맑스 경제학을 가르치지 않는게 정의로운 일일까? 서울대 경제학부의 학생 모두가 맑스를 거부한 것은 아닐 터이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이란 소수를 향한 다수의 횡포가 되어서는 안된다. 다수결은 타협이다. 당면한 문제 중에 어떤 것을 먼저 해결할지를 따지는 것일 뿐이란 말이다. 맑스를 공부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에게 이는 결코 공정한 처우는 아니다.


 학생의 수요문제를 따져보자. 한국에서 맑스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다. 세계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맑스는 수 없이 오용되어왔다. 하지만 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대부분이 누명임은 확실하다. 맑스가 말한 시대는 오지 않았다. 소련의 해체는 맑스의 실험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레닌과 스탈린의 실험이 실패한 것일 뿐이다. 맑스의 이런 이미지는 분명 그를 오용한 자들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다만 간접적으로는 한국 사회 전체의 책임도 있다. 수도에서 얼마 안되는 거리에 북한이라는 무력단체가 존재하기에 진행되는 반공교육은 프로파간다적이다. 반공교육을 하는 것보단 공산주의를 정확히 알려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라는 경제체제는 결국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기반으로 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은 독재국가다. 즉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다. 이런 측면을 명확히 교육하는 것이 오히려 북한에 대한 경계심을 더 철저히 세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자신한다.


 또 의심되는 것 중 하나는 서울대 경제학부의 웹페이지를 통해 교수진의 면면을 정말 간단히 훑어보며 생겼다. 이들 대다수가 미국에서 수학하고 학위를 딴 사람들이다. -대충 눈으로 훑기에- 뉴욕 대학 출신이 가장 많았고, 시카고와 예일 대학교 출신도 자주 눈에 밟혔다. 현재 경제학의 주류는 자유주의다. 미국에서는 특히 심한 편이다. 그 중에서도 시카고학파는 자유주의의 첨병이며 예일 대학교는 마르크스주의에 비판적이었던 케인스학파의 노선에 가깝다. 표면적으로만 따지면 주류학계에 속한 교수들이 반주류학계를 학교에서 추방하고 배제한 것처럼 보일 여지가 다분하다.


 또 제국경성대의 후신인 서울대학교는 특징이 하나 있다. 한국장학재단의 통계에 따르면 학생의 절반이상이 소득 9~10분위, 과반이 8분위 이상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런 소득분위를 나누는 기준에 헛점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서울대의 학생들이 다수의 중산층과 상류층으로 구성되어있다고 추측하기엔 충분하다. 이는 교수진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결국 중산층 가정에서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미국출신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결국 마르크스 경제학을 선호하지 않은 학생들도, 그 수요를 따른 -스스로의 주장에 따르면- 교수진도 자유주의라는 현재의 체제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결국 맑스주의에 기반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학자들이 모두 맑스를 배우지 않는 자유주의자라면 그것은 자유주의가 더 이상 비판받지 않을 것이며, 이는 결국 문제점이 지적되지 않고 발전도 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세계는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통계적으로 볼 때 미국보다 더 공정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맑스주의의 ‘합’이며,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미국을 대공황에서 구해낸 케인스주의도 결국 자유주의와 맑스주의의 ‘합’이다.


 슬픈 사실은 한국의 미래를 이끌 사람들이 독단적인 관점의 교육을 받을 것으리란 점이다. 그리고 더 슬픈 사실은, 관악에서 배우지 못했다면 한국의 미래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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