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인식론, 윤리론 또 미학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칸트의 철학적 체계는 저 세 분야만을 포괄하고 있지 않다. 그는 자신만의 역사철학도 전개해 나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인류의 역사는 영원한 평화의 상태로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소한 그는 자신이 꿈꾼 미래가 실현되기를 깊이 소망한 듯 보인다.
위 단락에서 유추할 수 있듯, 칸트의 역사철학은 단순히 인류사를 조망하고 나름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많은 근세철학자가 그러하였듯 칸트는 다양한 철학분과 또 철학 외의 다양한 학문에도 능통했다. 실제로 그는 대학에서 지리학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각설하고, 칸트의 역사철학은 그의 인식론과 존재론, 도덕철학과는 때놓을 수 없다. 때문에, 그의 역사철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앞의 세 분야에 대해 필요한 만큼만 언급하고 싶다.
우선 칸트는 이원론자였다. 이 이원론이란, 세상을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었다는 의미이다. 칸트는 인간이 신체를 통해 실존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체란 감각한다. 이 감각이 칸트의 인식론에서는 인식의 시발점이다. 감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은 현상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현상계에서 살고 있다. 문제는 인간의 인식능력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현상계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인식하고 살아갈 수 있는 세계이다. 반면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칸트는 이는 물 자체로, 때론 예지계라고 기술한다. 칸트는 현상계에서 얻은 인식을 개념 (혹은 경험)이라고 일컫는다. 이는 현상이 두 번 필터링 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각 자체도 특정한 형식과 제한이 존재하며, 감각을 통해 얻어진 인식도 지성 -과거에는 오성이라는 단어로도 많이 번역되었다- 이라는 인식기관에 의해 또 한 번 처리되는 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사물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인식능력은 감각과 지성이 끝이 아니다. 최상의 인식능력으로써 이성이 모든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 이성의 특이점은 오로지 형식이라는 점이다. 이성은 개념을 재료로 자신 고유의 형식을 통해 무엇인가를 추론해 나간다. 여기서 이성의 형식이란 보통 논리를 뜻함을 짚어두고 싶다. 필자는 위에서 인간이 현상계 바깥에 대해 인식할 수 없다고 설명하였는데, 이는 반쯤만 맞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성의 논리적 추론을 통해 예지계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는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예지계에 대한 지식으로 칸트가 예로 든 것은 세상이 무한하냐 아니냐, 또 세상은 무한히 작은 원소로 되어있냐 아니냐 따위의 논쟁이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그러한 예 중 하나로 세상에 자유란 존재하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을 다룬다. 그 논쟁에서 칸트는 두 주장이 모두 참이라고 결론 짓는다. 자연은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가 사는 현상계는 자연과 상호연관 되어있다는 점에서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예지계에서는 다르다. 예지계는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자유가 존재할 수 있다고 논변한다.
이후 칸트는 이성을 자유와 연결한다. 필자는 처음에 이 대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성은 결국 구체적인 각각의 사물과 인식을 추상화하고 동일화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이는 칸트적인 관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에 칸트가 댄 논거는 이성은 자기 자신이 원하는 입지점에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 첫째였다. 칸트가 스스로의 철학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비유한 것이 바로 이 논거와 연관되어 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에 인류는 이성의 입지점을 지구에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를 중심으로 세상이 돈다고 설명한 것이다. 허나 코페르니쿠스는 입지점을 지구에서 태양으로 옮겨놓았다. 칸트는 자신의 철학이 기존의 철학과 다른 입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성은 동일화하는 인식능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주의가 가장 많이 직면하게 되는 비판은, 이성 자체가 개개인의 개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형태로 조형시키는 폭력적인 존재가 아니냐는 것이다. 칸트는 또 하나의 논변으로 이성과 개개인의 개성을 조화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이성=자유라는 명제의 두 번째 논거기도 하다. 칸트는 이성이 선험적인 형식임에도 그것을 통한 인식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결국 형식일 뿐이고 그 재료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개념은 개인의 체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 다른 추론을 진행할 수 있다.
이제 원래의 화제로 되돌아올 시간이다. 인간은 당연하다시피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인과법칙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이며, 이성은 부분적으로 예지계에 속해있다. 이는 인간이 자연 내에 완전히 종속된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인간의 역사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을 통해 전개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특이한 점이 있다. 그는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면서 자연을 바꾸어나가는 일이 자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아무래도 칸트는 자연이라는 어휘를 큰 의미와 작은 의미로 섞어서 사용하는 듯하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인간은 '자연적이고 선험적으로' 이성을 수여받는다. 즉 인간이 자연을 극복해 나가고 역사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 역시 자연의 의도이자 내재된 요소인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이성을 통한 도덕법칙이 있다. 칸트는 이성이 더 크게 실현되고 역사가 발전할수록, 즉 자연에 더 많이 개입하게 될수록 세상이 도덕적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최초로 세계평화를 위한 범국가적 연맹의 필요성을 역설, 즉 UN의 출현을 예견했다는 것으로 나름 유명하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이는 칸트가 바랬던 역사의 결말이 영원한 평화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영원한 평화상태는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 일단 모든 사람이 보편적인 법칙을 지키는 사회가 현현되어야 한다. 또 각각의 사회 구성원들은 단순히 자신이 한 사회의 시민임이 아니라 세계시민 중 한 명임을 인식하고 그에 맞는 소양을 지녀야 한다. 동시에 범세계적인 의사 기구도 필요하다. 그는 이러한 이상향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자연의 궁극목적이며, 인간에게 내재된 도덕법칙의 명령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이런 주장에는 몇 가지 비판이 뒤따른다. 계몽주의, 또 이성주의가 패퇴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는 너무나도 낙관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특히 최근 전쟁, 환경 파괴, 정치외교적 혼란 등은 인류의 역사가 진보가 아니라 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든다. 당장 UN도 강대국의 꼭두각시라고 비판받은 상황이니 말이다. 칸트의 이상향에 대한 또 다른 비판 방식도 있다. 그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등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들이 칸트의 적통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은 그의 역사관을 아래의 방식으로 비판한다. 만약 어떠한 이상향을 전제한다면, 그 바깥에 있는 사물들을 이상향에 짜맞추는 폭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두 적자의 논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칸트의 믿음은 낙관을 넘어 허황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이들의 주장에는 모두 일리가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류의 역사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결국 도덕적인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다. 현재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의 다툼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전쟁등이 발생하고 있긴 하지만, 오늘날의 전쟁은 과거의 것에 비하면 빈도수도 적을뿐더러 이전처럼 전 세계가 모두 참전하는 거대한 규모로 이뤄지지도 않는다. 세계대전은 결과적으로 제국주의를 종결시켰으며 전체주의, 우생학, 전쟁 등이 인류에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확실히 인식시켜 주었다. -더 세련된 제국주의가 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엔 반박할 방법은 없지만- 필자가 이런 폭력들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이런 사례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역사는 스스로 수정되지 않는다. 법을 가장 빨리 개정하는 방법은, 법의 허점을 이용하여 실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공론장에서 논의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며 글을 마쳐보자. 칸트는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그렇지 않은 예지계로 나눈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을 통해 예지계를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 예지계는 자연과는 달리 인과법칙에 따르지 않는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역사의 발전은 이러한 과정이다. 또 인간의 이성 능력은 자연적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결국 역사의 발전은 자연의 의도이다. 칸트는 역사의 최후는 사람들이 세계시민으로서의 소양을 가지며 영원한 평화를 이룩한 세상의 도래라고 추론한다. 이 역시 자연의 궁극 원리이지만 동시에 이성의 궁극적인 실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성은 결국 도덕을 수행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에는 여러 이유로 비판받지만, 필자는 인류의 역사가 거시적으로 보면 도덕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는 사실 ‘그렇다’의 문제보단 ‘그래야만 한다.’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