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의 재해석으로서의「머리」(정보라)
비교를 통한 시대정신 인식
0.
문학에는 시대정신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설령 온전치 못한 형태로라도 말이다. 이는 문학을 통해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어낼 수도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서로 다른 시대의 두 작품을 비교한다면, 양자에 대한 더 명확한 지식을 끌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비교하는 두 작품이 주제와 소재가 흡사하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를 통해 시대정신을 비교하고 파악하는 작업이 보다 수월하고 효과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 글은 상기의 목적으로 쓰여졌다. 비교할 작품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정보라 작가의 「머리」이다. 또 필자는 「머리」가 『프랑켄슈타인』의 재해석이라고 생각하며, 이 글에서도 그를 상정한다. 우리는 이러한 바탕에서 두 작품의 공통점과 차이를 비교하고, 「머리」가 시대정신의 어떤 측면을 표상하는지 또 오늘 날에 어떠한 의미와 시사점을 지녔는지 평가할 것이다.
1.
우선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사전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 책의 출판은 19세기 초에 이뤄졌다. 이 작품은 최초의 SF중 하나임과 동시에 고딕소설에서의 독보적 명작 중 하나다. 여기서는 SF라는 장르에 대해 보다 이야기하기 보다는 고딕이라는 장르에 대해 이야기를 할 필요성이 있다. 고딕소설은 공포소설의 시초가 된 장르다. 음산한 분위기 따위를 통해 공포감을 조장하며,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적대자가 등장한다. 이 ‘초월적’이라는 뜻은 다른 세계의 존재 혹은 전지전능한 존재 앞에 붙는 것과 동일한 수식어는 아니다. 여기서의 ‘초월적’은 조금 더 포괄적이다. 고딕소설에서의 반동인물은 대개 인간의 이성으로는 불가해하거나, 물리적이나 정신적으로 인간이 제압할 없는 존재이다. 가령 『드라큘라』에서의 드라큘라는 강한 완력도 가졌지만 불멸하며,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절대악이고 신기한 주술까지 부린다. 이런 점에서 고딕소설의 적대자는 초월적이다.
『프랑켄슈타인』의 가장 크게 드러나는 정서는 ‘과학 진보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러한 두려움이 고딕적인 요소로 표현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 진보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자욱한 안개 속을 더듬거리며 걷다보면 몇 가지의 구조물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구조물은 반출생주의와 페미니즘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몇몇 연구자는 의무론적 해석 등 『프랑켄슈타인』을 보다 풍부하게 독해하는 경우도 많으나 이 글에선 생략한다.)
2.
정보라 작가의 「머리」의 장르는 호러물에 가깝다. 하지만 과학기술에 대한 논제, 반출생주의에 관환 화두,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이 작품 속에서 모두 발견된다. 즉 『프랑켄슈타인』을 해석하는 주된 관점들이 「머리」를 분석할 때도 모두 유용하게 사용된다. 따라서 필자 역시 네 가지 측면에서 두 작품의 차이를 논해보고자 한다.
『프랑켄슈타인』과 「머리」모두 과학기술이 사건의 시발점이 된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박사가 전기실험을 통해 여러 부위를 이어붙인 시체에 생명을 부여한다. 이 전기실험은 당시에 화제였던 갈바니즘 -갈바니라는 연구자가 개구리 뒷다리에 전기자극을 주었더니 움직임을 보였다- 을 기반으로 한 것다. 즉 당시의 기준에선 과학적 합리성이 보이는 것인데. 19세기에 존재했던 기술은 아니다. 역시 오늘 가능한 기술도 아니다. 즉 그것은 미래의 기술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메리 셸리가 표현한 두려움은 발전하고 있는, 혹은 미래의 과학기술에 대한 두려움이다. 과학기술의 산물인 크리쳐에 의해 진보의 선봉자인 박사를 죽음으로 몰고간다는 점에서 메리 셸리의 시도는 카산드라적인 예언으로도 볼 수 있다.
반면 「머리」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일상적인 도구, 즉 변기다. 머리라는 괴물은 변기에 떨어진 인간의 찌꺼기 -머리카락, 오물, 피등등- 를 통해 탄생한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 정보라 작가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가는 일상에 공포를 부여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녀가 「머리」라는 작품을 통해 지향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공포가 아니란 점을 알 수 있다. 그녀가 제시하는 공포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일상적인 기술에 대한 공포이다. 변기는 기술의 상징물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작품에서 페미니즘적 측면과 반출생주의적 측면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괴물이나 머리 모두 외적인 생김새로 인해 창조주로부터 버림받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이 얻은 시체 중에 최선의 부위들을 엄선하여 괴물을 만든다. 얼굴의 부위 하나하나만 보면 무척 빼어나지만, 합쳐놓고보니 무척 끔찍했다. 그 모습에 박사는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끼며 자신의 창조물을 버린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괴물은 또 외모가 끔찍하다는 이유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박사에게 복수를 선언한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의식은, 『프랑켄슈타인』에서 여성인물이 상당부분 배제됨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적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머리」에서는 어떤가? 사실 ‘나’가 머리를 혐오하는 이유가 그것의 외모 때문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과 달리 그러한 면이 직접적으로 서술되진 않는다. ‘나’는 ‘머리’에게 자신의 변기를 점유할 권리를 주지 않았으니 사라지라고 말한다. ‘나’가 가진 적대감의 근원은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 복합적인 이유를 가졌다고 봐야할텐데, 머리에 대한 최초의 외형묘사는 독자에게-또 화자인 ‘나’에게- 생리적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정확히 말하면 ‘머리’가 아니라 ‘머리처럼 보이는 어떤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크기는 보통 사람 머리 크기의 3분의 2 정도로, 아무렇게나 빚은 찰흙 덩어리 같은 누렇고 희끄무레한 머리통을 헝클어지고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덮고있었다. 귀는 없었다. 머리카락 아래에는 눈썹도 없이 가로 쭉 찢어져, 떴는지 감았는지 모를 두 눈이 있었다. 그 아래 있는 뭉그러진 덩어리가 아마 코인 것 같았다. 입 역시 입술도 없이 그냥 가로로 갈라져 있었다. 그런 입이 뻐끔거리며 그녀를 향해 말을 하고 있었다. 새된 목소리에는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 같은 꼴록꼴록 하는 소리가 섞여 있어 알아듣기 힘들었다.” -『저주토끼』 42p
하지만 페미니즘적 측면에서 「머리」는 스스로에게 영감을 준 작품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 -이 역시 단정적으로 서술되진 않으나- ‘나’는 한 명의 여성으로서 피대체(被代替)의 공포를 느낀다. 작중에서 ‘나’는 결혼을 하고 딸을 낳는다. 그 딸은 실제로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예쁘다고 묘사된다. 또 늙어가는 ‘나’는 자라나는 딸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사랑스러움과 동시에 어떠한 불쾌감을 느낀다. ‘나’가 그 불쾌감의 이유를 정확히 짐작하진 못하는 듯 하다. 하지만 작품의 맥락을 통해 그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다. 결말에서 머리는 완전한 몸체를 얻는다. 그 모습은 젊을적의 ‘나’와 똑같다. 머리는 변기 속에 나와 오히려 ‘나’를 변기 속으로 쳐박아버리며 자신이 진정으로 얻어야할 삶을 얻겠다고 선언한다. 젊은 ‘머리’가 늙은 ‘나’를 대체하는 결말이다. 즉 「머리」에서는 노화, 그에 따른 외모 변화로 인해 여성이 느끼는 피대체의 공포가 묘사되고 있다.
괴물은 창조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박사에게 복수를 선언한다. 그는 처음에는 인생에 혼자인 자신을 위해 인생의 동반자, 괴물신부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그것이 창조주의 의무라는 괴물의 논리에 박사도 납득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신부를 완성하기 직전 제조를 그만두고 오히려 몸체를 찢어발긴다. 충동적인 행동이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괴물은 이미 박사의 가족과 지인 몇을 해친 이후였다. 괴물이 어떤 삶을 살았던지 간에, 박사에게 그는 악인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박사는 자신이 만드는 신부가 어쩌면 더 큰 악이나 재앙이 되지 않을지 지속적으로 고민한다. 그런 상황에서 박사는 괴물이 창 밖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알게된다. 박사는 괴물의 끔찍한 외모에 순간적으로 혐오감을 느끼며 신부를 찢어버린다. 박사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만들어주기까지 한 존재가 은혜를 느끼기는 커녕 칼을 들이미니 썩 달가운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괴물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원하여 태어나지도 않았것만 창조주는 그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 괴물이 처한 상황이 소설적으로 과장되어있을 지는 모른다. 하지만 태어난 인간은 모두 타의로 인해 세상으로 던져진다. 또 몇몇 창조주는 창조물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책임을 다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낳아준 은혜를 갚으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류 역사 내내 반복되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이 고전이 된 이유는 반출생주의적 주제의식이 더 크게 작용한 듯도 하다.
물론 머리는 괴물과는 상황이 어느 정도 다르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자의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머리는 ‘나’의 의도로 만들어진 건 아니다. 또 머리는 ‘나’에게 큰 요구를 하지도 않고, 주변인을 해치지도 않는다. 오직 이전처럼 계속 변기를 사용해달라고만 요청한다. 그러면 자기는 성숙해진 몸을 지닐 수 있으며, 그럼 ‘나’로부터 독립해서 제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냉담하다.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머리’를 내몰차게 대한다.
하지만 머리는 -’나’의 입장에서-잊을 만하면 등장하여 심란하게 만든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머리는 완전한 몸을 얻는다. 그리고 괴물이 박사에게 요청하였듯, ‘나’에게 창조주의 의무를 다하라고 요구한다. 이 요구는 단지 입고 있던 옷을 달라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기 위해선 옷이 필요하지 않냐는 합리적인 이유를 들면서 말이다. ‘나’는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으나 반복된 부탁에 결국 수락한다. 옷을 입자 머리의 태도가 돌변한다. 그것은 늙은 ‘나’를 힘으로 제압해 변기로 빠뜨린다.
『프랑켄슈타인』의 반출생주의가 출생된 쪽에 포커스가 맞춰져있다면 「머리」는 반대다. 물론 ‘머리’는 원치않는 탄생했으며 창조주에게 미움받는다. 이 점에서 ‘머리’는 괴물과 동일한 처지에 놓여있다. 하지만 박사는 괴물로 인해 피대체의 공포는 느끼지 않는다. 출생이란 자신의 대체품을 만드는 일일 지도 모른다.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가치 역시 공급과 수요를 통해 결정된다. -이런 말을 정말 하고 싶진 않지만- 즉 출생이란 훗날 자신의 가치를 말소시키는 어리석인 일일 지도 모른다.
또 우리는 ‘머리’를 낙태된 아이나 원치 않은 임신으로 얻어진 아이를 상징하는 사물로 볼 수도 있다. -생리혈을 포함한 분비물이 변기 안으로 빠져들어가 ‘머리’가 생겼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나’가 머리에게 가지는 적대감도 어느정도는 이해될 성도 싶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여 아이를 베진 않는다. 서글프게도 말이다.
두 작품 모두 공포소설 -고딕소설도 조건이 까다로울 뿐이지 공포소설에 포함될 수 있으니까- 이다. 또 두 작품 모두 고딕소설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있다. 우선 두 작품 모두 환상성이 내재된 작품이다. 낭만적인 괴물이나, 찌꺼기가 보여서 만들어진 머리나 모두 환상적인 존재다. 또 머리나 괴물 모두 소설의 주인공이 혼자 맞서기 어려운 인물이다. 괴물은 초월적인 완력을 지니고 있으며 무척 지능적이고 민첩하다. 「머리」에서 ‘나’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머리를 없애버리려고 하는데, 그럴때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실제로 정보라 작가는 「머리」를 포함한 『저주토끼』의 작품들이 ‘환상호러’소설이라고 규정짓는다. 「머리」역시 작 중에서 끊임없이 긴장감과 공포감이 엄습해오며, 『프랑켄슈타인』역시 불온한 분위기가 소설 내에 가득하다.
3.
『프랑켄슈타인』가 보여주는 19세기의 초상은 이하와 같다. 당시는 계몽주의적인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면에는 진보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과학기술이 언젠가는 창조주인 인류를 위협할 수 있겠다는 불안말이다. 진보에 대한 낙관은 어쩌면 지식인들에게나 허락된 것일 지도 모른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하층민들이 기술발전에 의해 자리를 잃자, 러다이트 운동등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에 있던 진보의 부정성이 구체화된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어찌되었든,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이러한 SF적인 문제의식이 고딕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불안감과 공포라는 감정으로 표현된다. 이는 딱 맞는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고딕소설이란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장르이고, 과학기술에 대한 감정 역시 불안함이었기 때문이다. 또 반출생주의와 여성주의의 씨앗 역시 심어져있었으나, 그것이 오늘날처럼 구체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철학에서의 여성주의는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윤곽이 드러난다.
반면, 1998년 발표된 「머리」에서는 미래의 과학기술이 아니라 오늘날의 과학기술이 주된 공포의 대상이다. 물론 19세기 당시에도 런던에는 스모그가 있었고, 템스강은 오염되어 장어 밖에 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징후였을 따름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지구는 무한한 힘을 가졌다고 여겼으며, 이런 약간의 환경문제 따위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더불어 1998년 당시처럼, 또 오늘날 처럼 과학기술에 의한 부작용이 가시화되고 실제로 우리의 삶을 위협해오진 않았다. 『프랑켄슈타인』과 「머리」사이에는 세계대전이 있고, 교토의정서가 있었다. 또 「머리」와 오늘 사이에는 파리협약이 있었다. 또 지금은 지구온난화를 믿지 않던 사람들의 입이 쏙 들어가게 되었다.
여성주의와 반출생주의라는 화제는 조금 더 세밀해지고 구체적으로 변하였다. 출생이란 창조자와 창조물 양자에 불행을 가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이 밝혀졌다. 그 불행이란 여성주의와도 결합된다. 『프랑켄슈타인』에서의 여성주의가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관에 머물러있다면, 「머리」에서는 여성들이 가지는 피대체의 공포가 나타난다. 이 피대체의 공포란 젊음 또 그것과 비례되는 외모와 관련된다. 몇몇 연예인들이 나이가 들고 외모가 바뀜에 따라 새로운 인물로 대체되는 일은 오늘날 종종 보게 되는 일이다. 특히 남성에 비해 외모가 주된 평가요소가 되는 여성들은 이를 더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또 ‘젊음’과 ‘출생’이 연관됨도 의미심장하다. 젊음이란 곧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출산을 할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본능적으로 우리가 젊은 남녀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유도, 결국 유전자 보존에 대한 선험적 성질 때문이니까.
4.
여성과 남성이 평등해져야한다. 또 가부장제는 이제 이전 시대의 유물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페미니스트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한계 역시 뚜렷하게 알고 있다. -사실 페미니즘의 분류가 오늘 날에는 너무 다양해지긴 했지만- 어떠한 부조리는 누구나에게 나타날 수 있다. 여성에게도 두드러지게 적용되는 현상이 실은 남성에게도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페미니즘은 시야가 좁은 사조다. 특히 피대체의 공포가 그러한 예다. 발전된 기술과 피대체에 대한 공포를 한 플라스크에 넣고 흔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무수히 많은 사례를 봐왔으니까.
생산기술의 발전은 항상 노동자들의 권익증진이나 복지향상 따위의 낙관적인 기대가 뒤따라왔다. 과학과 공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의 본질적 목적은 결국 전인류의 복지향상을 위해서이니, 그러한 기대는 충분히 할법한직하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와 발전은 마치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을 위해 엄선된 부위를 사용하였나, 결과적으로 끔찍한 외형을 가지게 된 것과 같다. 박사는 거대한 이상과 긍정적인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과는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통신기술이 발전하자 전화교환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혁신적인 생산 기술들이 발전하였을 때, 기업가들이 내린 선택은 노동시간의 단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원들은 단축했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최근에는 키오스크가 대중화되면서 젊은 사람들은 아르바이트를 얻을 기회를 잃었다. 음료제조도 자동화 되면서 카페의 일자리가 줄었고, 몇몇 대형 식당에서는 서빙을 기계들이 한다. 최근 몇몇 휴게소는 라면과 우동을 기계가 끓이기 시작했다. 물론 앞에 나열한 예들은 1998년도에 있었던 일들은 아니다. 하지만 「머리」에 끊임없이 현대성을 불어넣어주는 사건들이다. 이런 피대체에 대한 공포는 초월적인 공포로 볼 수 있다. 러다이트 운동이 실패했고, 이제 그 누구도 일자리를 위해 기계에 대한 저항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다. 대체란 일방적인 힘으로 저항할 수 없다는 점을 말이다. 과학기술의 산물인 변기에서 나온 존재는 ‘나’를 대체한다. 모든 인간들은 피대체의 공포를 느낀다. 그러한 피대체는 젊은 세대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발전된 기술에 의해서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생산적인 활동을 지향하게 된다. 꼭 월급을 받고 하는 노동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표현의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사회적인 욕구 역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체 가능성은 인간을 본질적이고 또 만성적인 공포에 빠트릴 수 밖에 없다. 「머리」는 이렇게 페미니즘을 넘어선 보편적 문제의식으로 향한다. 대체가능성에 대한 공포라는.
결론적으로 「머리」는 『프랑켄슈타인』과 엇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지면서도, 보다 현대적이다. 또 두 작품을 읽어보면, 두 시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손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여성주의와 반출생주의의 구체화에서도 나타나지만, 과학기술에 대한 공포가 어떤 방향전환을 이뤘는지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프랑켄슈타인』의 공포가 당시 와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던 것이라면, 「머리」는 현세적 공포를 지니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박사는 괴물에게 계속 놀아나고 복수에 성공하지도 못한 채 사망한다- 공포가 끊임없이 인간을 끌고다니는 것이라면,「머리」우리가 수없이 경험한, 대체의 공포를 표현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시대의 정신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파악할 수 있다. 메리 셸리의 예언은 오늘 날 지구온난화나 대규모 전쟁. 학살 따위의 일들로 실현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놓친 것이 있다면, 기술로 인해 인간이 대체되는 문제였다. 19세기의 시대정신의 무의식이 미래에 이뤄질 과학적 재앙을 두려워했다면, 20세기 -그리고 또 오늘 날- 에는 지금도 끊임없이 재발되고 있는 과학에 의한 대체가능성을 두려워한다. 정보라는「머리」라는 작품을 통해 -마치 쇼펜하우어가 칸트의 의지개념의 빈 부분을 보충하듯- 메리 셸리가 놓친 부분들을 다룬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분명 머리보다 원초적이고 포괄적인 작품이다. 이런 점에서 양자의 작품은 일방적인 진보라고 단순히 치부하긴 어렵다. 오히려 둘은 상호보완에 가까운 텍스트일지도 모른다. 사실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일어날 재앙을 우리는 자주 상상하곤 하며, 두려워한다. 가령 핵전쟁이라던가, 해수면 상승 따위의 문제 말이다. 동시에 우리는 AI로 인해 바뀔 미래를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근저에는 피대체의 공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