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망한 사랑』서평
리얼리즘은 죽지 않았다.
“민주당은 자신이 버린 노동계층에게 버림받았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크게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It should come as no great surprise that a Democratic Party which has abandoned working class people would find that the working class has abandoned them.”
2024년 트럼프의 승리를 보고 샌더슨은 이렇게 적었다. 약 4년 전, 트럼프의 당선과 그의 임기를 지켜본 센델 역시 샌더슨과 비슷한 맥락의 지적을 한다. 본래 노동자들의 편이었던 민주당은 언젠가부터 신좌파의 영향을 받은 엘리트주의 집단으로 변모했다. 그들은 노동자의 고통과 생활세계의 문제에서부터 삶과 유리된 주제들로 관심을 돌렸다. 이러한 조류는 미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노동계층에 대한 좌파의 배신과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극성 우파의 기승은 유럽과 한국에서도 똑같이 발생했다. 이런 파도 앞에서 한국 문학계는 길 잃은 부표처럼도 보인다. 이러한 파도에 휩쓸리고 있다. 한국 문학사에서 근래는 퀴어즘과 페미니즘 소설이 가장 왕성하게 써지는 시기다. 그런데 이 필자는 왜 책 얘기는 안 하고 정치 얘기나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조금 망한 사랑』은 이런 조류를 역행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조금 망한 사랑』은 김지연 작가의 단편집이다. 수록작인 「반려빚」의 경우 평론가들에게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필자 역시 동의한다. 더불어 사회적 리얼리즘이라는 색채는 「반려빚」을 넘어 단행본 전체의 주된 색감이다.
리얼리즘이라는 문학 사조의 전성기는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기 전이다. 남은 것은 사양길뿐. 이제 젊은 세대들은 리얼리즘이나 노동자 문학 따위를 쓰지 않는다. 그런 글들을 썼던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도 이제 리얼리즘에서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작품관의 전회를 시도하기도 한다. 리얼리즘은 죽었다. 최소한 시한부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했다. 필자 역시 그랬다. 이런 상황에 김지연 작가는 리얼리즘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조금 망한 사랑』이 현진건이나 조세희처럼 노동의 문제에 밀착해 있는 건 아니다. 그들처럼 직설적이지도 않다. 퀴어즘과 페미니즘과 완전히 척을 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보이는 김지연의 관심은 필자에게는 퍽 반가웠다. 물론 『조금 망한 사랑』의 가치는 반가움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김지연 작가는 날의 삶에 크게 밀착되어 있는 소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배틀그라운드와 같은 게임, OTT, 반려동물과 같은 요소들 말이다. 또 그녀는 문장에 꽤 적극적으로, 하지만 적절하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외국어를 사용한다. 이런 덕분에 『조금 망한 사랑』의 문체는 퍽 현대적이고 친근하다. 완성도는 말할 것이 없고. 이런 특징들을 비롯해 김지연 작가가 보여준 감수성은 젊다. 병실에 누워있다고만 생각했던 사회적 리얼리즘은 이렇게 젊은 활력을 얻었다. 이 활력이 얼마나 갈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최소한 『조금 망한 사랑』은 성공했다.
필자는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의 단편을 읽고 짜릿한 경탄의 감각을 느꼈다. 그 감각은 위에서 아래로, 척추뼈를 따라 흐른다. 『조금 망한 사랑』을 읽고도 엇비슷한 것을 느꼈다. 현실을 훌륭하게 모사한다는 건, 즉 훌륭한 리얼리즘 문학에는 그러한 위력이 있다.
필자는 퀴어즘이나 페미니즘을 싫어하진 않는다. 집을 떠난 노라를 응원하고, 몰리나가 총을 맞을 때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퀴어즘이나 페미니즘 문학이 발표되는 숫자를 생각해 보면 발전이 더딘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자주 떠오르곤 한다. 계층 간의 갈등과 부조리도 언젠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점은 동감한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들보다 계급 간의 갈등과 부조리 -그러니까 빈부격차 따위- 가 보다 시급한 과제다. 중산층, 지식인 계층에게 하루하루의 끼니, 당장 다음 달의 식사를 걱정하는 노동자들의 경험은 별세계의 이야기듯, 노동자들에게 중산층과 지식인 계층의 지적 유희는 별세계의 이야기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글을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의 관심은 유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조금 망한 사랑』은 그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그것도 훌륭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