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비판과 한국 퀴어문학의 저변확장
손종원의 「리틀 프라이드」는 한국문학의 저변을 넓혀준 작품이다. -비록 완성도는 꽤 떨어지는데- 여러 가지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꽤 가치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밝히고 싶은 것 역시 그것들이다. 하지만 그 전에 「리틀 프라이드」라는 소설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할 듯 하다.
「리틀 프라이드」는 ‘나’와 오스틴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엮여있는 투톱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을 한 트랜스젠더이고, 오스틴은 ‘나’보다 연차가 더 높은 직장 상사다. 둘은 빈티지 의류를 판매하는 회사에서 일한다. 오스틴은 SNS를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회사가 자리를 잡게 해준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그러다가 사건이 일어난다. 오스틴은 인스타그램에 빈티지 패션을 입은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영상을 올렸는데, 그가 거기에 등장했던 여성에게 찝쩍거렸다는 소문이 난 것이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소설에서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소문은 파급이 컸다. 오스틴은 결국 회사에서 퇴사를 결심하고 ‘나’에게도 하소연한다. 술을 마신 오스틴은 ‘나’에게 그 여성이 ‘페미’라서 자신을 헐뜯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오스틴에게 불만을 느끼면서도 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을 동시에 느끼며 혼란스러워한다. 퇴사를 한 후, 그는 사지연장술을 하기로 결심한다. 오스틴도, 나도 키가 160 정도밖에 되지 않은 남자들이었다. 그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모양이다. 오스틴은 ‘나’에게 키가 크면 페미가 아닌 좋은 여자를 만날거라는 다짐에 대해 말해주고, ‘나’가 트랜스젠더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해준다. 오스틴은 병실에 앉아 수술을 기다린다.
필자가 관심이 간 인물은 주인공보다는 오스틴이다. 오스틴의 행동, 그러니까 단신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사지연장술을 행하는 것 말이다. 이는 실존주의적으로, 또 비판이론 -특히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실 둘의 요지는 같다. 오스틴은 자신의 결단을 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한 양태이자 현현으로서 기능한다. 실존주의적 해석은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그저 뫼르소를 떠올리기만 하면 되니까. 오스틴은 뫼르소와 반대되는 인간이다.
키가 큰 남자가 선호받는 것은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이다. 즉 이는 인위다. 이 인위란 자연, 즉 당연하고 바뀌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즉 오스틴은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꼭 준수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스틴은 결국 사지연장술을 선택한다. 필자는 이 행동이 인위를 자연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호르크하이머의 논문인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은 인위, 즉 문명이 자연으로 둔갑하는 현상을 비판한다. 이러한 현상이 비판받아야 마땅한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그것이 모순이기 때문이다. 문명이란 태초부터 자연에 대한 반동으로 인간의 안위를 위한, 자연에 대한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문명이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되며, 부조리 역시 극복 불가능 한 것으로 인간에게 인식되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득권과 억압적인 사회의 유지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마지막으로 인간 역시 자연이라는 점이다. 인간에게도 자연적 요소들이 내재되어있다. 하지만 인위는 그러한 자연을 억지로 변화시킨다. 인간이란 본래 하루 8시간 일하고, 매일매일 일하던 생물이 아니었다. 수렵시대에는 한 번 사냥에 나선 후면 며칠 동안 내리 쉬기만 했다는 주장도 있으니까. 하지만 문명 속에 사는 인간들은 매일매일 하루 8시간을 일해야만 한다. 심지어 어떨 때는 추가 근무도 하니까.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오스틴의 사지연장술은 스스로에 내재된 자연을 훼손시키는 것이다. 키가 작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자연적이다. 즉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스틴은 지배 이데올로기, 키 큰 남성에 대한 선호에 순응하며 스스로에게 메스를 들이댄다. 직접적으로 이는 그의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메커니즘을 추격해 보면, 그것이 사회적 부조리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자명하다.
키를 늘리고 페미가 아닌 여자친구를 사귈 거라는 오스틴의 말은 그러한 메커니즘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라고 말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반사회적인 체제이고, 사회적이어야만 하는 동물인 인간에게는 터부시의 대상이다. 그리고 남자는 키가 커야 한다는 테제도 가부장제의 산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리틀 프라이드」는 가부장제에서 이뤄지는 개인에 대한 억압과 폭력에 대해 다루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리틀 프라이드」의 주제는 이보다 더 보편적이다. 필자가 위에서 말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대한 이야기를 상기해 보자. 바로 지배 이데올로기가 개인에게 내면화되는 모습과 인간을 위해 자연에 저항하는 문명이, 어떻게 자연으로 변모하고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리틀 프라이드」는 퀴어소설이지만 더 보편적으로도 비판소설이다.
물론 그렇다고 「리틀 프라이드」가 퀴어-페미니즘소설로의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의 의의는 한국 퀴어소설의 저변확장을 일궈내었다는 것에 있다. 본래 한국의 퀴어소설은 끽해봐야 동성애자를 다루었다. 사실 이러한 현상에 필자는 꽤 불만이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해서 퀴어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게 불만이 있었다. 퀴어소설을 쓴다는 것은 약자를 대변하겠다는 마음, 이것이 너무 거창하다면 약자에 관심을 가지겠다는 마음을 품겠다는 다짐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결심으로 글을 쓴다는 작가들이 동성애자들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사회는 계급이 아니고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군가가 약자냐, 강자냐는 것은 수많은 요소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단순히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냐 아니냐를 떠나서 말이다. 동성애자를 성소수자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이 과연 약자일까? 물론 이들보다 강한 사람들은 많지만 이들보다 약한 사람들도 많다. 동성애자들이 근 몇 년 전부터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내왔고 이는 정치세력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치세력화되지 못한 수많은 존재들이 있고, 서발턴들이 있다. 그러한 존재들을 다루는 것이 바로 소설가들의 역할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의 퀴어문학가들은 그러한 의무를 방기해 왔다. 그것은 아마 게으름, 아니면 애매한 재능과 허영심의 결합으로 인한 것일 테다.
하지만 한국퀴어문학의 이러한 풍조에는 최근 조금씩 변화가 있어왔다. 필자는 2024 젊은 작가상의 수상작인 「이응이응」에서 그러한 변화를 느꼈다. 김멜라 작가는 이 소설에서 특정한 정체성을 지닌 인물을 대두시키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성정체성은 가려져 있다. 이러한 기조는 작품이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이가 핵심은 아니다. 「이응이응」은 sf소설로, ㅇㅣㅇ이라는 가상의 기계장치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 기계는 인지과학의 산물로서, 사람들의 성욕을 해소시켜주는 기계다. 단지 캡슐 안에 들어가 금고아 같은 머리띠만 쓰면 된다. 이 기계는 본격적으로 가동하기에 앞서서 여러 코스를 선택할 수 있는데, 그 코스에는 사용자의 성적 정체성이나 지향성을 여러 선택지로 제시한다. 즉 ㅇㅣㅇ이라는 기계는 특정 퀴어만을 위한 물건이 아니다.
다시 「리틀 프라이드」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손종원 작가는 김멜라작가로부터 바톤을 이어받았다. 김멜라 작가가 모든 구체성을 없앰으로써 퀴어소설의 저변을 확장했다면, 손종원 작가는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 「리틀 프라이드」의 주인공은 남성으로 성전환한 트렌스젠더이고, 반동인물인 오스틴 역시 키가 작은 남성으로서의 고충을 표상하는 존재다. 「리틀 프라이드」는 한국 퀴어문학적 맥락에서 저변을 크게 명시적으로 확장시킨 작품으로서 큰 의의가 있다. 비록 여러 부분에서 작품성이 떨어지지만 말이다.
이 소설은 페미니즘 소설보다는 퀴어소설로서 다뤄지는데, 필자는 다른 부분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후로는「리틀 프라이드」를 퀴어소설보다는 페미니즘소설로의 맥락에서 다루고 싶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퀴어장르와 페미니즘 장르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 어떤 측면에서 볼 때 후자가 전자에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본질이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이라면, 퀴어소설은 필연적으로 페미니즘소설에 포괄된다. ‘주인공’ 역시 기존의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다. 오스틴 역시 마찬가지다. 키 작은 남자는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다. 「리틀 프라이드」가 이런 점을 충분히 잘 다뤘다고 보여지진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가부장제 아래에서 남성이 받는 차별을 보이고자 하였음은 확실하며, 이는 분명 한국문학의 저변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 심지어 남성 페미니스트들 조차도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들이 받는 차별들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