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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May 22. 2023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어감은 멋진데......,

방향성으로 이해하면 어렵진 않다!

 


 모더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구조주의니 탈구조주의니라는 단어를 종종 접해보았을 것이다. 만약 미술이나 영화 등의 분야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포스트모던이란 표현엔 이골이 났을 테다. 혹자는 현대의 영화이론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만 대강 알아도 대부분 이해하거나 해설할 수 있다고도 하는 실정이니 말이다. 하지만 용어가 사용되는 빈도와는 별개로 뜻은 꽤나 아리송하다. 스스로가 책 좀 읽었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도 말이다. 어감도 무언가 멋진 듯 어렵게 느껴지고. 필자도 뜻이 궁금해 여러 번 찾아보았지만, 너무 어려워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아마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칼로 베듯 딱딱 나눠 떨어진다고 보긴 힘든 개념이라는 것도 영향이 있을 것 같다. 어떤 철학자들은 모더니스트면서 포스트모던한 사고도 했다거나, 양측 모두에 속한다고 평가받는 경우도 있다. 필자도 충분히 교양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며 읽은 자료들을 정리하여 적어볼 계획이다. 특히 철학을 중심으로 말이다. 사조의 이름이 같더라도 분야에 따라 내용은 조금씩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미리 스포일러를 하자면, 둘은 본질적으로 방향성이다. 모더니즘은 합리를 향해 나아가는 지적 흐름이라면 그 반대편으로 내달리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모더니즘이란 단어는 구조주의라고 자주 번역되곤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탈구조주의라든가, 포스트구조주의라든가로 번역될 때가 잦다. 학계에선 둘을 거진 동일한 표현으로 쓰인다. 하지만 따져보면 모더니즘과 구조주의의 뜻은 엄연히 다르다. 탈구조주의라거나, 포스트구조주의라는 표현도 충분히 엄밀한 표현은 아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구조주의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할 거다. 구조주의란 본래 소쉬르 20세기 언어학자의 주장으로부터 기원했다. 그는 단어 각각의 의미는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과의 연관이 아닌 언어라는 체계 내에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즉 개체는 구조 내에서 의미가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개체보단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무언가를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쉬르의 아이디어는 인문학계에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대표적인 구조주의 예술가 몬드리안의 화폭. 참 구조적이다.


 가령 문화학의 경우는 개개의 현상을 문화구조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다던가. 심지어 개개의 인물마저도 구조 내에서 형성되고 의미를 가진다고 사람들도 다수 나타나기 시작했다.-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상기와 같은 사유가 폭발적으로 유행하게 된 계기는 실존주의에 대한 반동과 불만에서였다. 실존주의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그게 정상이다. 이해하라고 있는 개념이 아니니까. 그래서 당시 사람들도 실존주의에 염증을 느낀 걸 테다.


 그렇다면 구조주의와는 다른  모더니즘은 무엇일까? 모더니즘은 특정한 학문이 아니라 방향성이다. 핵심만 말한다면 바로 “계몽”이라는 가치를 중시했던 세계관이기도 하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수백 년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세 시대에는 종교에 의한 비합리적 권위와 전통 등이 인류를 지배하던 시기였다.-적어도 그 시대의 눈에는 그랬다.- 언젠가부터 철학에선 데카르트, 흄, 라이프니츠 등이, 과학에서는 뉴턴, 갈릴레오 등이 나타나며 중세철학적 사고를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지식인들은 중세적 가치관과 작별하려는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활동했다. 당시의 이러한 지적 방향성이 바로 ‘계몽주의’다. 이러한 점에서 계몽주의는 특정한 학문 분야나 학파가 아니라 사조 -지적 방향성이라던가, 사상 조류라던가-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래서인지 ‘계몽’의 정의는 비록 사상가마다 통일된 견해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비합리적 권위, 전통, 미신 등에 의지하여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것이 계몽이라는 칸트의 말에 가장 많이 참고되는 의견이긴 하다. 아주 단순히 말하자면 똑똑해지자! 는 거다.


 이러한 합리주의적 노선의 특징으로 엘렌이라는 학자는 자족성, 이성, 진보, 낙관주의를 지적했다. 자족성이란 인간은 자기와 세상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는 성향을 의미한다. 인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함의하고 있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성과 합리를 중시했고, 차후에는 이성 절대주의로 비약하기도 했다. 계몽주의는 이성적 전통과 질서로 확립되고 유지되었다. 더불어 그들은 인간과 인류는 진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믿었고, 진보에 대해 낙관했다. 내일은 반드시 오늘보다 긍정적일 거라는 신념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발전의 원동력은 바로 인간의 이성적 능력 덕택이다. 이러한 합리주의는 현대적이고, 현대를 건설해 냈다는 의미로 ‘모더니즘’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모더니즘 한 생각의 산물들이 바로 과학의 발전, 개인주의, 본질주의, 민주주의 등이다. 그리고 상기의 과정에서 일관된 진리가 있다는 믿음이나 체계성, 구조적인 무언가를 중시하기 시작했다.-개인⋅민주주의와 이상의 설명이 모순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막대한 분량이 필요하므로 생략하겠다.- 이러한 사상조류는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지되었다. 구조주의 역시 -인간을 비롯해-무엇이든 이성적으로 특정한 체계 내에서 본질적이고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적 노선의 끝에 서 있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직역하면 '현대 이후적인'정도 될 성싶다.-영어를 잘 못해서 그런지 자신은 없다.-이름만 봐도 알겠지만, 모더니즘 이후의 사상조류를 일컫는다. 계몽주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있던 후 무너져 내렸다. 이후 독일의 도시 프랑크푸르트에는 유수의 석학들이 모여들었는데, 세계대전 이후 인류가 나아갈 방향성을 찾기 위한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인들은 이성에 대한 극단적인 믿음 때문에 이러한 비극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학도들은 계몽주의에서 벗어나자고 선언했다. 그들은 합리가 아닌 인간을 위한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보자고 결의했는데, 최초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들은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불린다. 현대 철학자 중 가장 거대하며 90살의 나이에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하버마스 선생도 여기 소속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것이 아니다. 들뢰즈, 데리다 등의 프랑스 철학자들의 아이디어에 가깝다.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상기의 프랑스 철학자, 이 둘의 차이는 꽤 크다. 프랑크푸르트의 철학자들은 합리주의의 비극은 이성만능주의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성을 도구화하고 왜곡하여 사용한 것이 화근이라고 생각했지, 이성 자체를 대해 부정하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체계를 ‘비판철학’이라고 부른다. 반면 프랑스의 철학자들의 아이디어는 이성자체를 부정했다. 이들은 실존주의의 후계자들로서 모더니즘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체하려고 들었다. 이 해체라는 건 없앤다고 이해해도 좋다. 이성, 구조, 본질, 대립, 차이, 과학에 믿음 등등을 말이다. 편의상 이번 글에선 이런 사유들을 ‘해체주의’라고 표현하도록 하겠다.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해체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 대게 해체주의자들을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분류하고, 전술한 프랑크푸르트의 학자들은 비판철학자로 별칭 하니 말이다. 다만 해체주의라고 하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크게 와닿진 않을 수 있다. 그러니 필자는 혹자가 우스갯소리 한 말을 언급하며 설명을 이어가려고 한다.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물 dancing huase, 사진 출저는 위키백과다


 “저기서 사람이 어떻게 생활하냐? 란 생각이 드는 건물이 보이면 그건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물이야.” 우리가 흔히 보는 건물들은 모더니즘적 가치관에 따라 건축되었다. 즉, 특정한 이유를 위해 합목적성을 띠고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인터넷에서 우리는 정말 기괴하게 생긴 건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길거리에서 보는 것도 가능하지만 흔친 않다. 과거에서 무조건 벗어나게 지으려고 하다 보니 디자인이 괴악해진 거다. -클라이언트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설계도를 승인한 건진 모르겠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 건물 중에도 무리 없이 사용하고 사용될 수 있는 것들도 꽤 많다. 그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과장해서 말한 것으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 좀 더 세밀하게 논의해 보겠다. 모더니즘의 개념들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했다는 점을 상기하며 읽으면 보다 이해가 쉬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보통 이하의 특징들을 보인다.


 첫째는 불확정성이다. 모더니즘에서 모든 것은 이성을 통해 예상과 이해가 가능한 것들이었다. 허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선 과학을 비롯하여 세상 대부분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불확정적인 무언가가 된 것이다. 두 번째는 미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다. 거대한 구조나 체계 대신 개별자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문학계에서 거시 담론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고 미시 담론이 활성화된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세 번째는 권위로부터의 탈피다. 이는 단순히 이성주의에서 탈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권력이나 사회, 전통 등 모든 탈피할 수 있는 모든 권위에 대한 탈피다. 현대 예술은 이러한 생각에서 발전했다. 가령 행위예술이라던가. 기존 예술을 예술로 만들어 주던 구분을 거부하는 것이다. 계몽주의가 비합리적 권위로부터의 탈출이었는데, 이젠 계몽주의가 그러한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꽤 아이러니하다. 다음은 혼성모방이다. 남자가 여성스러운 옷을 입고 여성이 남성스러운 옷을 입는 것을 생각하면 쉽다. 포스트모던 시대가 되면서 학제 간 연구도 더욱 활성화된 것도 이런 영향권 아래 있다. 더불어 해체주의에서는 모든 대립을 해체-삭제-했다. 가령, 여성과 남성의 구분에 대한 해체, 예술과 비예술의 구조에 대한 해체 등등. 불교의 무아를 생각해도 좋다. 너와 나라는 구분의 해체 같은 것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주된 화두 중 하나다. 마지막은 보편성이다. 계몽주의에서 나온 보편성을 제거한다는 목표와 원칙이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들에 보편적으로 내재하여 있다. 즉,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모두 특정한 학파나 학문 분야가 아니라 특정한 지적 방향성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도 정반대 되는 쪽으로.


 다만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계몽주의가 집을 짓는 학문이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반대다. 집은 부수었지만 재건할 생각은 없다. 도움은 안 되는데 입은 쉬지를 않는다. 모든 것을 해체한다는 생각에 매몰되니 어떠한 건설적인 담론을 진행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스스로까지 붕괴시키고도 하는 모양새다. 모더니즘을 대신하여 인류에게 새로운 안식처가 되어줄 새로운 가치나 의미를 내보이지 못한 것이 해체주의의 현태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큰 장애물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공부하면서 얻은 정보를 간단하게나마 적어보았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는 현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해체주의와 계몽주의가 충돌하는 아노미상태-무규범 상태: 어떠한 기준으로 행위를 해야 할지 사람들이 판단할 수 없는 상황.-로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두 가지가 딱 나눠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상반되는 방향성을 지녔음을 인지한다면 충분할 성싶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번 글은 지극히 철학적 관점에서 쓰였다는 점이다. 여타분야의 사상 조류들은 같은 이름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세밀한 내용과 시기는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철학에서 실존주의란 포스트모더니즘적 노선에 있지만, 실존주의 문학은 엄연히 모더니즘으로 분류된다. 이 정도의 지식이라면 웬만한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믿는다. 이만 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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