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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Jul 10. 2023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서평

젊은이에게의 사려가 부족한 사회

 





 어디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을까? 썩 영양가 있는 일은 아니지만, 편하게 마음을 먹자는 의미로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부터 적어내려 보기로 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며 필자가 얼마나 편식된 독서를 하는지 깨달았다. 어떤 분야의 책이든 펼치면 끝까지 읽었고, 특별히 편견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기에 깨닫는데 꽤 늦어버렸다. 이후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면 괜히 문학이나 철학이 아닌 서고에도 어슬렁거리곤 했다. 그러다 눈에 띈 책이 바로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였다. 부제는 '밀레니얼 세대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 밀레니얼 세대는 정지우 작가 본인이 밝히길 80~00 초반의 출생자까지를 아우르는 표현이라고 한다. 즉 MZ세대와 사실상 같은 의미다. 이전까지 젊은 세대에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런데 책의 제목과 부제를 읽어보니 어쩐지 호기심이 생겼다. 필자는 제목을 보고 꽂힌 책을 읽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언젠가부터 젊은이들을 묶으며 추상화고 단순화하는 MZ세대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산불이 번지듯 퍼졌고, 사람들은 이 표현을 앞다투며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실 개개의 것들을 추상화하는 일 자체에 별 불만은 없다. 일상적인 차원이든 학술적인 차원이든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카테고리를 묶는 일은 필수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문제는 MZ세대가 기성세대와 사회 속에서 어떠한 체험을 하고 있느냐이다. 본래 세대 간의 갈등이야 항상 있어왔다. 필자는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이나 동정, 애정 따위를 가지고 있진 않다. 타고나길 호젓한 이방인으로 타고났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날 그들이 겪고 있는 부담과 고통은 꽤 부조리한 면이 있다. 이는 사실이다. 그들은 다른 세대로부터 유난히 많은 공격을 받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스스로를 대변할 일말의 기회와 힘조차도 없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MZ세대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보다 소외받고 있는 계층이다. 필자와 저자 모두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저자는 서론에서 책의 목적을 시대의 증언이라고 적었다. 즉, 팔자가 평가해야 할 것은 정지우 작가의 증언이다. 다만,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이 학술인 저서가 아닌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란 것은 유의해야 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며 이 증언이 얼마나 타당한지, 현실에 대한 그의 시선이 얼마나 유효하지가 본 책의 가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당연하게도 서평에 남길 것도 이러한 내용이다.


 책의 초반부에서 저자는 MZ세대를 환각의 세대로 진단했다. 환각이란 단어가 지칭하는 것들은 꽤 다양하다. 인스타그램이나 '나 혼자 산다'등으로 표상되는 TV프로그램들에서 등장하는 화려한 생활말고도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가 가르치고 설파해 왔던 미래에 대한 낙관이나 가치관들 역시 환각에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MZ세대의 삶은 막상 그렇게 화려하거나 편안한 것은 아니다. 그들 대다수가 느끼는 삶은 꽤 불안하고 비관적이다. 이러한 실제와 환각들 사이의 괴리에 노출되고 분열되고 있는 세대가 바로 이들이다. 이러한 환각들 사이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다름 아니라 명품, 해외여행, 오마카세, 골프, 자동차 등이다. 금전적으로 약간의 무리를 한다면 단시간이지만 이것들을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들에게 기성세대가 노력을 통해 이룰 수 있었던 서울의 자가, 배우자, 자식, 정치적 성공 따위를 갖는 것은 하늘에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이런 진단과 함께 정지우 작가는 MZ세대에게 가장 중시되는 화두로 '청춘', '젠더', '공동체' 세 개를 뽑아 각각 하나의 장에 할애하고 있다.


 청춘에 대해 논하는 1장, 정지우 작가는 젊은이들이 현재 처한 상황과 행동의 근거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저자는 피상적으로 신세대를 바라보며 비판하는 기성세대에게 신세대의 변명을 대신해준다. 심리적 분열이란 필연적으로 불안을 초래하는 일이다. 이기적으로 보이는 MZ세대들은 분열된 개인들일 뿐이다. 인스타그램에서 표상되는 향략적인 젊은이들은 타인과의 연결이 멈출 수 있다는 불안 앞에서, SNS에 화려한 사진을 업로드하기 위해 노력한다. 필자는 더불어 이러한 지적에 또 다른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밀레니얼 세대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해하며 공격하는 것은 기성세대만이 아니다. 신세대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충분한 숙고를 하지 않으며 공격 혹은 이해가 불가능한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YOLO를 즐기지 않는 어떤 젊은이들은 자신과 같은 또래의 사람들에게 생각은 없고 허세만 가득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혐오감을 내비칠 때도 있다. 이런 생각이 사실일 수도 있다. 문제는, 같은 또래이자 세대, 연대와 애정의 대상이 되어야 할 존재에 대해 고민할 생각 혹은 여유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2장에서는 젠더갈등에 대해 다룬다. 1장과 연결되는 논의긴 한데, 저자가 지적하는 바는 젠더갈등을 비롯해 젊은이들이 겪는 많은 문제의 근원은 낡아빠진 가부장제에 있다는 점이다. 즉, 전통적인 관념과 사회구조가 문제의 핵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통에는 나름의 미덕과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은 가부장제와 어울리는 시공간적 배경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젠더갈등이 여타 계층갈등과의 차이점이라면, 이들은 서로가 사라지길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성과 남성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며 열망하는 존재다.-보편적으론 그렇다. 그들은 연대하고 협력해야 한다. 사회적 부조리를 함께 타파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3장에서는 공동체에 대한 화두로까지 논의가 확장된다. 젊은이들에게 이 공동체가 어떻게 여겨지는지,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저자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이야기를 펼친다. 여기서 정지우 작가는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공동체가 더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여기까지 책의 내용은 대강 다뤄보았다.


 우선 책을 읽기 전에 독자들이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사안들이 있다. 이 단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호불호가 어느 정도 갈릴 만한 요소긴 하지만 심각한 경우는 아니다. 첫째는 전술했듯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는 개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에세이라는 점이다. 또, 필자 역시 그랬듯 모든 독자가 저자의 생각을 전부 수긍할 순 없을 것이다. 셋째는 저자가 증언 이상의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는 점이다. 가령 위로라거나, MZ세대들이 나아갈 방향이라던가 말이다. 서론에서 밝힌 '증언'의 역할을 벗어나는 바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는 독자의 경향에 따라 장점이 될 수 있는 부분들이다. 특히 화제의 당사자인 MZ세대가 어떤 감상을 느낄진 모르겠지만,


 결론을 내야 할 것 같다. 우선 정지우 작가의 주장들은 꽤 설득력 있다. 석연찮은 것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의 주장 대부분은 꽤 그럴듯했다. 즉, 증언으로써 충분한 정도의 성취가 있었다. 문장도 편안하고 술술 읽히었다.-저자가 글을 상당히 잘 쓴다.- MZ세대를 환각의 세대로 진단하며 내민 기성세대를 향한 변호, 젠더갈등의 본질을 가부장제로 지목하는 것도 썩 훌륭한 주장이었다. 위에 필자가 책에서 호불호가 갈릴 만한 요소로 '증언 이상을 시도하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를 뽑았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가 가진 최선의 가치는 신세대에 대해 사려 깊은 이해와 변호, 더 나아가 위로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필자의 말이 모순되어 보이지만 말이다. 잘 읽었다.




  마지막으로 글의 전체적 맥락과 내용과는 별개로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다. 사소한 것이지만. 228쪽에서 저자는 스스로의 가정이 그리 풍족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회고 바로 뒤에, 비록 중고지만 차를 두 대 소유하고 운용할 수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는 언급이 있다. 더불어 가정이 외벌이로 유지될 수 있었다는 암시도 있다. 물질적 풍족함의 기준은 물론 상대적이다. 하지만, 저런 표현은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을 넘어 어떠한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과한 겸손함은 몇몇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넘어 저자 역시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문장이나 표현을 꼬치꼬치 지적하는 것은 말꼬리를 잡는 것 같아 좋아하진 않는다. 다만 이런 오해를 피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므로 실례 무릅쓰고 굳이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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