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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안으로 볼 수 없는 파리

『파리의 노트르담』.『파리의 우울』,『말테의 수기』

by 새현

필자는 집돌이다. 주말에는 보통 집에 있는다. 유일한 취미 생활은 침대에 누워있기다. 외출이 세 시간이 넘으면 녹초가 되는 저질 체력과 안면을 튼 사람과도 사적 대화를 하지 못하는 내향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여행은 질색이다.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거나 돈을 쓰는 건 당연 좋아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집 밖에 있다는 부담을 짊어질 정도는 아니다.


더더욱이 필자는 파리라는 도시에 별 관심은 없었다. 최근엔 파리의 악명이 꽤 퍼져있지 않은가? 파리에는 에펠탑과 고풍스러운 건물에 자리한 맛있고 분위기 좋은 식당, 자신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은 파리지앵과 루브르 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지저분한 공용시설과 거리의 쥐떼들, 한국인으로서는 답답한 일 처리도 공존하고 있으니까.


그러다 파리에 가보고 싶어졌다. 도쿄올림픽이 끝나고 나온 2024년도 파리 올림픽의 예고편 때문이었다. 그것이 공들인 연출의 결과물이란 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영상에 남은 파리의 모습은 그 어디보다 아름답고 열정적으로 보였다.-특히 우주에서 나팔을 부는 장면은 짜릿했다.- 하지만 당분간 파리로 떠나긴 요원해 보였고, 막상 몸을 움직이기도 싫었다. 파리에 가고 싶다는 욕구와 인생을 날로 먹고 싶다는 욕구 사이에서 꽤 머리를 썩혔다. 그러다 필자는 어느 날 본 경구가 떠올랐다. 한 낭만주의 문학가가 말하길, 최고의 여행은 상상력을 통한 여행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필자의 비루한 상상력으론 혼자 여행을 떠날 순 없었다. 그래서 유능한 가이드들을 섭외했다. 빅토르 위고, 보들레르, 말테가 그들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아름다운 도시 파리~ 전능한 신의 시대~ 때는 1482년~ 욕망과 사랑의 이야기~

이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막을 여는 노랫말이다. 필자는 이 뮤지컬의 영상을 유튜브에서 주기적으로 찾아볼 정도로 좋아한다. 원작인 『파리의 노트르담』와 내용적 차이가 다소 있지만 대략적인 줄거리는 같다. 뮤지컬이 욕망과 사랑의 이야기듯, 원작 소설도 욕망과 사랑의 이야기다.


『파리의 노트르담』는 에스메랄다라는 집시 여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사실 집시태생은 아니고 콰지모도라는 꼽추와 아이시절에 바꿔치기 당해 집시들 사이에서 자란다. 그녀를 중심으로 노트르담 성당에서 종일 치는 꼽추 콰지모도, 성당의 주교는 프롤로, 잘생긴 외모의 헌병대장 페뷔스, 소설에서는 개그담당인 음유시인-사실 거렁뱅이게 가까운- 그랭구아르, 집시들의 우두머리인 클로팽이 얽히고 섥히며 진행된다. 이들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에스메랄다를 사랑한다. 그녀에게 헌신하는 콰지모도나 순순히 마음을 접는 그랭구아르등과 다르게 추잡한 방식으로 에스메랄다를 사랑하는 자들도 있다. 특히 에스메랄다가 이미 약혼자가 있던 페뷔스에게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향한 프롤로에 대한 집착이 극에 달하면서 작품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에스메랄다는 강제적 팜므파탈로 거듭나고 파멸하게 된다.


책의 초반부에서 빅토르 위고는 당대의 파리를 묘사하는데 힘을 다한다. 그는 건물 하나하나를 자세히 묘사하고, 어느 곳에 위치했는지 상술한다. 마치 그 때의 파리로 본을 떠 소설에 옮겨놓으려고 하는 것 처럼. 이는 『파리의 노트르담』의 주인공은 다른 그 누구가 아닌 파리라는 도시라는 점을 시사한다. 빅토르 위고는 노트르담 대성당에 적힌 ‘숙명’이라는 단어를 보고 작품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라면 필연적이고 가지고 있는 욕망과 사랑이 수 없이 부딪히는 도시의 숙명을 묘사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콰지모도가 쳤던 종과 집시들이 나뒹굴던 거리, 페뷔스와 그를 미행하던 프롤로가 걸었던 골목골목이 눈 앞에 생생하다.



『파리의 우울』


『파리의 우울』은 보들레르라는 시인이 낸 시집이다.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대부분의 시가 당대의 파리를 배경으로 한다. 우선, 이 작품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모두 산문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타 운문보다 내용의 기승전결을 파악하기 용이하고, 살짝 길기는 하지만.


또 다른 특징이라면 보들레르는 보통 파리하면 으레 생각하기 마련인 것들에 시선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풍스럽고 건물과 시내의 낭만스러운 모습, 멋들어진 레스토랑과 호텔, 훌륭한 프랑스의 음식들과 개선문과 같은 랜드마크와 파리의 빛들 말이다. 대신 그의 시선은 파리 도처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우울함을 향해 있다. 초점은 중심부에서 밀려난 파리의 낙오자들에게 맞는다. 추한 노파, 음울한 광대, 거리에서 자선을 구하는 거지 등등……, 그는 대중들을 경멸한다. ‘개와 향수병’이라는 시에선 대중들을 한 마리의 개로 비유할 정도다. 대중이란 정신적 쾌락이나 예술적 감각이라곤 없는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동시에 낙오자들을 자신과 동류라고 여기는 미묘한 태도를 견지한다.


화자의 태도는 무척 모순적이다. 빛 아래에 사는 자들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 도시의 그림자에서 사는 사람들을 경멸하면서도 사려 깊게 살피며 시의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여성에 대해 악담을 퍼부으면서도 자신의 뮤즈로 삼은 시들도 여럿 있다. 파리가 자연을 배척한 공간이라는 이유로 사랑하면서도 구름과 같은 자연물을 주요한 소재로 다루기도 한다. 보들레르의 유니크함과 댄디함은 이런 점에서 나온다. 남들은 애써 피하는, 혹은 평생 알지 못하는 도시적 우울함에 애착하는 모순된 인간.


그는 파리의 새해 축제를 “눈과 진흙의 뒤범벅”, “탐욕과 절망이 들끓고”, “가장 투철한 고독한 자의 머리조차 혼란케 하는 대도시의 이 공공연한 광란.”이라고 묘사한다. 같이 파리를 배경으로 했지만, 다른 시집에서는 “옛 변두리 거리 한복판”을, “거대한 파리의 뒤범벅된 구토물.”이라고 묘사한다. 에필로그를 보자. 화자는 파리를 산에 올라 파리의 온갖 곳, 병원, 창가, 연옥, 지옥, 도형장을 내려다본다. 그는 파리를 지독한 매력을 지닌 거대한 갈보라고 비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언한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오, 더러운 수도여!” 왜냐하면 “무지한 속물들은 알지 못하는 갖가지 쾌락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말테의 수기』


『말테의 수기』는 독일의 시인인 마이너 릴케가 쓴 장편소설이다. 이번 글에서 다루는 작가 중 유일하게 비프랑스인이다. 동시에 랄케의 유일한 소설이기도 하다. 『말테의 수기』는 독일 최초의 현대소설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선 색다름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은 “그래, 이곳에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이후의 분위기 역시 우수에 젖어있다. 이 분위기는 『파리의 우울』과 결이 비슷하다. 다만 『말테의 수기』에는 조금 더 으스스한 분위기가 있다. 이는 서술자인 말테가 파리의 고독하게 마주하는 탓도 있지만, 중간중간 삽입된 과거 회상이 꽤 으스스한 분위기로 쓰여있기 때문이다.


사실 회상이 중간중간 삽입되었다는 말도 애매할 성싶다. 분량의 약 절반 정도가 회상과 단상으로 채워져 있으니 말이다. 이런 회상은 말테가 본 물건들로부터 파생된다. 그는 현재와 과거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예술과 사랑, 삶과 죽음 등에 대해서 숙고한다. 역자는 이 『말테의 수기』가 시인이 세상을 어떻게 보냐를 써 내린 작품이라고 했다. 확실히 시인의 감각에는 보통의 사람들은 포착하지 못하는 것을 인식하는 무언가가 있다. 서정주는 두견새를 보고 사별한 임과의 거리를 포착했다. 괴테는 은행잎을 보고 둘이자 하나인 자신과 연인의 모습을 본다. 그의 눈이 파리의 빛을 향해있진 않다. 하지만 시인의 눈으로 파리를 볼 수 있다는 일은 짜릿한 일이다.



책을 덮었을 때, 파리를 가고 싶다는 열망은 사그라들어 있었다. 대신 강렬한 인상이 나의 결핍을 충족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파리의 시내 건물 하나하나까지 살폈고,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는 사랑과 욕망의 이야기를 보았다. 그리고 퀴퀴한 거리와 빈민들을 보았고, 연옥 같은 도시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공장처럼 사람을 수용하는 대병원을 지나치며 시인의 눈으로 파리를 보았다. 책만 있다면 환상적인 여행은 언제나 할 수 있었다. 보통의 관광객들은 겉에 보이는 파리만을 보고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문학을 통해서라면 파리의 내밀함을 느낄 수가 있다. 오히려 문학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취하라,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보들레르는 취해있으라고 강권한다. 취기가 가라앉는 순간 삶의 중압감이 덮쳐올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음울한 파리에 취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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