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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나'와 실제의 '나'

『살인자의 기억법』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by 새현

1900년 초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등장 이후 하나의 테마가 된다. 한 세기가 지난 이후로도 이 테마는 아직 힘을 잃지 않고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필자가 직접 읽은 것은 아니지만) 몇몇 식자들의 말에 의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아가 기억'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기억은 자아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 적어도 스스로가 생각하는 나는 기억을 근간으로 한다. 기억이란 스스로의 자아를 정체화하는 수단이자 근거다. 문제는 실제와 생각 사이의 긴장이다. 오늘은 이러한 '자아와 기억'사이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 탐구한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볼 참이다.


『살인자의 기억법』


시골에 치매 노인 한 명이 산다. 이름은 김병수다. 그는 70살을 먹은 전직 수의사고 집을 들락날락거리는 딸도 하나 있다. 과거로 흘러가는 자신의 붙잡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치매 탓인지 수시로 녹음기를 틀어 스스로를 기록한다. 그리고, 그는 연쇄살인마다. 공소시효가 지날 때까지 잡히지 않은 재능있는 살인마. 작품은 그 녹음을 중심으로, 마치 진짜 치매 환자가 말하는 듯 짧은 문단들로 연결되어 있다.


딸과 함께하는 일상은 그럭저럭 흘러간다. 그런 일상은 한 청년이 마을에 나타나며 금이 가기 시작한다. 자신을 박주태라고 소개한 인물을 주인공은 자신과 같은 살인마로 확신한다. 그의 자동차 후미에 피가 묻어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딸인 은희가 그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다. 주인공은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25년 만에 또 한 번의 살인을 계획한다. 늙은 몸으로 매일 팔굽혀펴기를 하며 몸의 긴장과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박주태와의 대결은 성사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경찰에 잡혀버린다. 박주태는 살인마가 아닌 경찰이었다. 김병수는 최근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을 그가 일으켰다고 확신했지만, 아니었다. 딸인 은희를 죽인 것도 김병수였다. 그는 은희가 비록 친딸은 아니지만 나름의 애정을 주며 키운 것처럼 기록한다. 그리고 자신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은희를 입양한 이유는 자신이 죽인 여성이 딸만은 지켜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에게 최소한의 의리는 남아있다는 듯, 스스로 악마나 초인일지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아직 인간성이 남아있다는 듯. 애시당초 은희는 그의 딸이 아니었다. 자신을 돌봐주던, 자신이 죽여버린 요양보호사였을 따름이다.


경찰에게 심문을 받고 재판에 선 그는 여러 가지를 증언한다. 하지만 25년 전의 살인들만 증언할 수 있었을 뿐, 최근 자신이 저지른 살인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못한다. 무슨 수를 써도 기억이 나지 않고 현실과 상상을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뇌가 해삼처럼 변해간다. 남들의 삶을 결정짓던 그도 시간 앞에선 한낱 무력하게 바스러지는 존재일 뿐이었다.


결말에선 그는 공空 속으로 사라진다. 마치 자신이 읊었던 불경의 구절처럼. 불교에선 자아란 없다. 실체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마음일 뿐이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세상은 마음대로 나타난다. 그 스스로가 원하던 자아상대로 기억과 세상이 형상된 것이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살인자의 눈에는 살인자만 보일 뿐이다. 그리고 공 속으로 사라진다. 언젠가 그는 말했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줄리언 반스에게 멘부카상의 영예를 안겨준 작품이며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장편치고는 짧은 분량 속에서 서술자인 토니 웹스터는 단성과 서사, 과거와 현재의 기억 사이를 분주하게 오간다. 그는 자신의 인생과 기억에 대해 성찰하고 독자에게 토로한다.


토니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은 베로니카와 에어브리언 둘일 것이다. 베로니카는 40년 전-토니의 나이는 약 60이다.- 서술자가 학생일 때 사귀었던 여자다. 그녀는 토니를 집으로 초대해 함께 며칠을 지내기도 한다. 반대로 토니는 그녀를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기도 한다. 그의 기억 속에서 베로니카는 정신적 결핍을 지녔던 무척 예민한 여자였다.


토니와 친구들은 10대에서 벗어나 성인이 된다. 성인이 된 또래들이 으레 그렇듯 그들은 각자의 진로를 찾아 흩어진다. 그러던 중 토니는 에어브리언의 편지를 받게 된다. 자신과 베로니카와의 교제를 허락해 줄 수 있냐는 내용의 편지였다. 본래 에어브리언은 토니를 비롯한 친구들의 동경을 받던 사람이었다. 질투를 할 엄두도 안 날 정도로 지적 능력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토니 다른 친구들 처럼 그에게 환심을 사고 인정받고 싶어 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수컷들은 이런 상항에선 으레 질투를 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니는 둘의 연애가 우정에 금을 내지 못할 것이라고 쿨하게 답장을 쓴다. 오래지 않아 에어브리언은 자살한다. 서술자의 표현은 빌리자면 "1등급 성적, 1등급 자살"이었다. 토니의 어머니는 말한다. 그가 너무 똑똑해서 자살은 한 것이노라.


1장이 끝나면 작품의 시점은 지금, 그러니까 60살의 토니로 돌아온다. 그는 아내와 이혼했다. 독립한 딸과는 소원해졌고 말동무를 해줄 친구도 없다. 하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삶이라 자평한다. 어느 날 그는 베로니카의 어머니인 사라에게서 약간의 유산과 편지를 받는다. 편지의 내용은 에어브리언과 친구로 지내주어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이 유산에는 원래 에어브리언의 일기도 포함되어있었다. 하지만 그 일기장은 베로니카가 가져가 버렸다. 토니는 편지를 되찾기 위해 나선다. 변호사와 대화도 나누고 베로니카에게 끈덕지게 달라붙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그녀는 토니에게 일기의 일부를 실제로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일기의 내용이라곤 온통 수학공식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결국 진실이 밝혀진다. 토니는 에어브리언과 베로니카의 교제를 쿨하게 허락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에어브리언에게 실제로 썼던 편지에는 둘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 아이를 낳으며 대대로 저주가 이어질 것이라는 노골적인 원망, 베로니카에 대해 그녀의 어머니와 잘 상의해 보라는 말들이 적혀있었다. 또 하나의 진실은 그가 에어브리언과 베로니카 사이의 자식이라고 추정하였던 인물이 사실 베로니카의 남동생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에어브리언과 사라의 자식이었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사라는 토니에게 자신의 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지 말라는 경고를 한다. 그에게 이를 일종의 충고로 인식되었고, 베로니카를 경계하는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사라의 이러한 언행은 걱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딸의 남자친구를 성적으로 유혹하기 위한 수작이었다.


스스로의 부정확한 기억들과 애매하게 남은 편지와 일기, 이메일은 토니에게 잘못된 예감과 확신을 형성했다. 역사가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듯, 기억은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토니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전 연인과 친구의 교제를 쿨하게 인정해 준 인물이었다. 베로니카는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정서적 결핍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친구의 자살에 영향을 주고 유산마저 뺏어간 인물이었다. 에어브리언은 그녀가 교제하다 자살을 한 친구다. 사라는 자신의 딸에 대해 경고해준 사람이다. 하지만 진실은 어땠는가? 실제의 토니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가 기억하던 사람들은? 그는 비겁한 사람일 따름이었다. 에어브리언의 자살에 관여했다는 사실과 책임에서 도망쳐 온 인간......, 토니는 역사 시간에 선생님이 했던 이야기에 대해 생각한다. 그가 묻는다. 역사는 무엇인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스스로의 부정확한 기억들과 애매하게 남은 편지와 일기, 이메일은 토니에게 잘못된 예감과 확신을 형성했다. 역사가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듯, 기억은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토니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전 연인과 친구의 교제를 쿨하게 인정해 준 인물이었다. 베로니카는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정서적 결핍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친구의 자살에 영향을 주고 유산마저 뺏어간 인물이었다. 에어브리언은 그녀가 교제하다 자살을 한 친구다. 사라는 자신의 딸에 대해 경고해준 사람이다. 하지만 진실은 어땠는가? 실제의 토니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가 기억하던 사람들은? 그는 비겁한 사람일 따름이었다. 에어브리언의 자살에 관여했다는 사실과 책임에서 도망쳐 온 인간......,




『살인자의 기억법』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반전을 지닌 스릴러다. 그것도 빌어먹을 스릴러. 이건 장르의 문제가 아니다. 두 책에서 일어나는 반전과 긴장이 고스란히 독자의 삶에 전이되기 때문이다. 김병수가 생각하던 자신과 실제의 김병수, 토니가 기억하던 자신과 실제의 토니는 썩 다른 인물이었다. 적어도 두 작품 속에서 기억은 휘발된다기보단 왜곡된다. 그리고 이 왜곡은 시간 때문에만 발생하는 건 아니다. 스스로를 충격에서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도 비겁한 왜곡의 한 축이다. 스스로의 추악한 본모습에서 도망치겠다는 치졸하고 비겁한 본능, 책임에서 도망치겠다는 비겁한 본능이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필자가 생각하는 나와 실제의 필자는 썩 다른 인물일 지도 모른다. 사실은, 썩 다른 인물이 맞을 것이다. 어쩌면 훨씬 더 추악한 인간일 수도 있다. 일생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긴장감과 불안감이 마음 속에 팽배하다. 나는 과연 떳떳한 인간인가? 나는 과연 저 둘과 다른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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