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잠에 들기 위해선 항상 약을 먹어야만 한다. 흰 쪽은 수면유도제, 붉은 쪽은 항불안제. 나에게 항불안제가 처방되는 이유는 중간에 잠을 깨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붉은 약은 생각을 줄이는 기능도 수행한다. 하지만 효능이 복용 즉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완벽한 것도 아니다. 이 약들은 사람을 몽롱하게 하고 감성적으로 만들며 자기통제력을 낮춘다. 그 때문에 가끔 상상도 못했던 생각이나 행동을 하곤 한다. '그 생각'도 그렇게 무의식 속에서 위로 부상해온 것 중 하나였다. 나는 자주 음울해지고 두려워진다. 고독하고 불안하기 그지없다. 우울이란 불가항력적이고 불가해적이다. 나는 무기력한 존재다. 그렇게 믿어의심치 않았다. 무기력적 태도에는 중독성과 의존성이 있다. 스스로를 아무런 잘못과 책임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무언가를 위해 노력할 필요도 사라지게 만드니까. 이것은 심리적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물론 감정이란 현상이 호르몬과 신경계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이뤄진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는건 그런 시시한 게 아니다. ‘나는 사랑 때문에 두렵고 불안하다.’ 깨닫고 싶지 않았던, 날 부숴버린 진실.
이게 다 『사랑의 기술』 때문이다. 아프다.
나는 왜 하필 이 책을 고른걸까……,
『사랑의 기술』 을 쓴 에리히 프롬은 비판철학이라고도 불리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2차세계대전 전후로 형성되었는데, 그들이 착수했던 프로젝트는 학제간 연구를 통해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비판하는 것이었다. 이는 인류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였다. 프롬은 정신분석적 훈련을 받았고 그를 통해 학문적 성과도 내었다. 나치는 왜 하필 독일에서 발생하였는가? 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던 프롬은 차후 실천적인 방향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는 사회가 개인의 인격에 손상을 준다는 것엔 동의했다. 하지만 생산수단, 즉 물질적 변화만으로 이상사회가 현현될 거라 믿을 만큼 순진하지도 않았다. 이상사회는 생산수단의 진보와 개인적 차원의 진보 모두 필요로 한다. 그는 정신분석과 신맑스주의-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뿌리는 맑스주의였다.- 외에도 수 많은 학문적 전통과 사상을 통해 스스로의 학문을 구성했다. 이 책은 그러한 결과물이다.
『사랑의 기술』은 네 개의 장으로 나뉜다. 1장의 제목은 ‘사랑의 기술’이다. 첫 번째 단락에서 이러한 문장이 나온다.“이 작은 책은 ‘사랑은 기술이다’라는 견해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현대인은 물론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고 있다.” 이 문장은 둘로 나눌 수 있다. “이 작은 책은 ‘사랑은 기술이다’라는 견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와 “대부분의 현대인은 물론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고 있다.” 1장의 내용들은 이 두 분절에 모두 함축되어있다. 우선 프롬은 ‘사랑은 기술이다.’라고 선언한다. 다음으로 당대의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착각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언급하는 착각은 총 세 가지이다. 1, 사랑은 ‘하는’것보다 ‘받는’것이 더 중요하다. 2, 사랑은 대상의 문제다. 3,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시작’이라는 현상과 ‘사랑이 지속’되는 현상을 혼동한다. 최소한 첫 째와 둘 째 문제는 현대의 자본주의에 의해 더 심화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 역시 시장적 논리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랑이라는 자주 실패한다. 문제는 인간은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연구하고 노력하는 것 뿐이다. ‘사랑의 기술’ 마지막에서 프롬은 기술의 습득을 위해선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론의 습득, 실천의 습득, 기술에 대한 궁극적 관심이 그것이다. 다음 장인 ‘사랑의 이론’과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에서는 이론에 대해, 마지막 장인 ‘사랑의 실천’에서는 제목 그대로 실천의 습득에 대해 다룬다.
‘사랑의 이론’장에서 프롬은 인간의 실존적 불안 -그리고 이를 해결하는게 인간의 절실한 욕구다.- 은 분리에 따른 불안때문에 발생하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사랑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이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유일한 생물이다. 즉 이성이란 인간만의 힘이다. 분리란 이런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즉 세계를 파악하지 못해 무력함을 의미한다. 이 무력함은 동시에 수치심과 죄책감을 수반한다. 이후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여러 부류의 사랑을 구별하고 분석하며, 미성숙한 것과 성숙한 것을 나눈다. 성숙한 사랑은 타인에게 애정어린 관심을 가지고 개성을 유지하며 합일하는 활동이자 세상에 대한 태도이며 관심이다. 다음 장은 내용은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라는 제목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선 현대가 어떻게 사랑의 문제를 심화시키는지 설명한다. 프롬이 가장 먼저 언급하는 문제는 자본주의의 문제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시장의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자본주의에서 사랑은 시장논리로 이해되며 교환활동으로 치부된다. 그것은 상대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특정 대상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야한다. 이 집중을 키우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선행해야하는 일은 자극이 없는 상태를 견디는 일이다. 이 훈련을 통해 타인과 연결되지 않은 채로도 버틸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사랑을 하기 위해선 우선 사랑이 없이도 견딜 수 있는 사람이자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한다. 자신의 외로움을 위해 상대를 사랑하려는 행위, 그것은 자신을 위해 상대를 수단으로 만드는 비도덕적인 행위이며 미성숙한 사랑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 이러한 이유로 사랑은 단지 즐거운 감정 따위가 아니다.
이 책은 엄연히 고전으로 취급받고 있다. 고전이라는 것은 세상에 등장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유의미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적 선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에세이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지적한 문제들은 오늘 날 해결되었다고 말할 순 없다. 자본주의는 ‘천민’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악해졌다. 동시에 구조적으로 더 발전되었고 공고해졌다. 프롬은 사랑을 위한 훈련은 명상과 비슷하다. 그것은 자극을 최소로 줄이고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이니까. 자본주의는 대중에게 끊임없이 자극을 주입하며 사람들은 이에 익숙해졌다. 또한 “우리 문화는 사람들이 이러한 고독을 의식하고 깨닫지 않게끔 도와주는 여러 가지 완화제를 제공한다.” 이러한 일종의 대체품들은 불안을 해결해주는 듯 보이지만 일시적일 뿐. 실상은 고립에 의한 불안을 심화시킬 뿐이다. 덕분에 인간은 자극이 없이는 견디지 못하게 되었디. 그러니까 ‘사랑이 필요없는 상태가 되는 것’은 점점 고단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요인들은 간접적일 뿐이다. 미성숙은 직접적으로 본인의 책임이다.
나는 무정한 사람이다. 그래야만 했다. 이른바 정신과 의사들은 이런 생각을 정신병적 징후라고 진단할 것이다. 상관없었다. 논리학적으로 볼 때 내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하는 주장의 타당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정신병은 지식인 계층의 선언일 뿐이다. 그런데 에리히 프롬은 200쪽지도 쓰지 않고 나의 25년을 산산조각냈다.
프롬의 말 중에 나에게 밀물처럼 와닿고 냉기처럼 사무치는 말들이 있었다. 사랑은 특정 대상을 향하는게 아니라 삶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활동이라는 것. 그리고 자기애는 악덕이 아니라 성숙한 사랑의 기본조건이자 결과라는 말이었다. 스스로를 무정한 인간이라 정의하는 것은 미성숙한 인간이라는 사실만을 표상해준다. 프롬은 사랑은 사람에 대해 끊임없는 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라고 하였다. 나는 스스로에게 조차 일말의 관심과 애정을 주길 포기한 미성숙에 갇혀있다.
『사랑의 기술』은 누구나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프롬과 대화를 나누고 사흘 후의 00시 30여분 즈음 난 눈을 감았다. 카뮈는 삶이 부조리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사랑하는 것이 참된 실존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참으로 진지한 삶의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나도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프롬이 내게 대답한다. 충분한 노고만 들인다면……., 빨라진 맥박, 가슴의 통증, 편두통. 공황발작은 수면제와 함께 융해되며 시간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경험은 무의식 속으로 흘러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