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철학자인 탈레스와 밀레투스 학파를 통해
학문은 무엇일까? 본격적으로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는 난제다. 단순히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생각하기엔 신통찮지 않은가? 하지만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볼 방법은 있다. 바로 학문의 최소조건을 찾아보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최초의 학문인 철학의 태동기를 살펴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이 최초의 학문이라고 불린 이유가 있을 것이고, 최초의 학문으로 발전하기까지의 과정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 우리는 최초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탈레스와 그 후학들인 밀레투스학파가 어떻게 철학적 전통, 학문적 전통이란 것을 세워나갔는지를 고찰해봐야 할 테다.
탈레스가 태어나고 활동한 것은 기원전 6세기경. 그 이전까지는 그리스는 미토스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미토스는 그리스어로 시, 신화 등을 뜻하는 단어이다. 미토스적 세계관이란 세계를 신화적으로 설명하였다는 의미다. 가령 ‘겨울이 오는 이유는 봄의 여신 데메테르의 슬픔 때문이다.”라거나 “태양이 지고 뜨는 이유는 헬리오스가 태양마차를 타고 하늘을 여행하기 때문이며, 아프리카 사람들의 피부가 새카만 이유는 태양마차가 땅과 가까이 운행해 살이 타버려서 그렇다.”라는 것이 당시의 지식이었다. 당시에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등속의 시인과 극작가들이 최고의 지성인으로 군림하던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이라면 이런 것들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이 시대의 시들도 인문학적 가치와 탁월한 아이디어를 품고 있다. 그리고 철학적 사고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도 물론 내재되어있다. 호메로스가 그려낸 신들은 성격도 행동도 엉망진창이지만, 그들조차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힘에 대해 표현한다. 헤시오도스는 자신의 우주에 신들의 변덕성 대신 어떠한 일관적인 도덕법칙을 채워 넣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세상을 설명하기엔 무언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탈레스는 우리와 같은 문제의식과 맞닥뜨린 인물이었다.
탈레스가 직접 로고스란 말을 강조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미토스적 세계관에 반하는 로고스적 지성의 시발점이 된 인물이라는 건 사실이다. 로고스라는 단어는 수많은 뜻을 가졌는데, 대략 이성, 진리, 합리성 정도로 이해하면 충분하다. 여하튼, 탈레스를 비롯한 초창기의 철학자들은 자연철학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그들이 찾고 싶어 했던 것은 '세상의 근원이자 만물을 이루는 불변의 요소'였다. 이들은 그것을 '아르케'라고 명명했는데, 탈레스는 아르케를 물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어째서 물을 만물의 근원이라고 하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대신 아리스토텔레스가 옛 철학자들에 대해 기술하며 '만물은 물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자기 나름의 추측을 기록해두었다. 모든 것의 물에 의해 모든 것이 생존해나가고, 생명 역시 축축한 것에서 태동하며, 모든 것의 자양분 역시 축축하다는 사실에서 탈레스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적어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탈레스의 주장을 곡해하였을 가능성은 있으나- 독자들의 시점에서 본다면 이는 얼토당토않은 말일 것이다. 우리는 그가 2000년도 더 전의 사람이라는 걸 유의해야 한다. 더 나아가 그의 사유가 가진 역사적 의의에 대해 고찰해볼 필요성 역시 있다. 탈레스 이전의 지식인들은 세상을 문학적이나 종교적, 혹은 신비스럽게-미토스 적으로-표현했다. 반면, 탈레스는 우리의 감각에 의거해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과연 충분할까? 학문의 태동이라는 업적을 탈레스의 공으로만 돌리는 것이 옳은가? 탈레스는 철학의 아버지, 혹 학문의 아버지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하지만 학문의 태동이 오로지 그의 덕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치 않을 수도 있다. 전통이라는 것은 한 선구자만의 노력이 아닌 동료와 후손들의 노력으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탈레스를 필두로 학파를 오늘날엔 밀레투스학파라고 부른다. 이는 그들의 활동지에서 따온 이름이다.
우리가 이어 살펴볼 사안은 탈레스와 동시대에 함께한 제자이자 동료들인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다. 이들은 밀레투스학파에서 가장 유명한 삼총사이기도 한데, 저 둘의 주장들을 통해 학문적 전통이란 무엇인지 탐구해볼 예정이다. '만물의 물이다'라는 탈레스의 주장에 많은 밀레투스 시민들은 그를 비판하며 나섰다. 아낙시만드로스도 그중 한 명인데, 핵심만 요약하자면 특별한 속성을 지닌 원소가 세상의 근원을 이룬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물이 아르케라면 물과 반대되는 불-당시의 상식이었다.-불은 어떻게 만들어지냐? 라는 투의 문제 제기다. 이 날카로운 제자가 주장한 아르케는 무한정자-그리스어로 아페이론-라는 것이다. 무한정자란 어떠한 질적 속성도 지니지 않은 무언가다. 이 무언가의 양적변화를 통해 여러 원소가 만들어지고 세상이 구성된다는 논리다. 이런 주장이 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지라 탈레스가 아닌 아낙시만드로스를 최초의 철학자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추상적인 철학을 최초로 한 사람인 것은 꽤나 타당해 보인다.-
곧 아낙시만드로스의 말에 반기를 든 인물이 나타났다. 삼총사 중 막내라고 할 수 있는 아낙시메네스다. 그는 아르케를 공기라고 주장했다. 특정 원소가 아르케가 될 수 없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논증에서 어떤 원소가 아르케가 될 수 있다는 탈레스적 아이디어로 회귀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주장에서 퇴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한 주장들을 뜯어보면 '만물은 공기다.'라는 명제가 이전보다 더 완성도 있고 발전한 논증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모두 아르케가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 세상을 이루는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아낙시메네스는 이 부위를 제대로 노렸는데, 그는 공기의 밀도에 따라 사물들이 생성되고 변화된다고 보았다. 그 증거로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들을 논거로 들었다. 숨이란 것은 입술 때문에 촘촘해져 차가워지나 입이 열리면 빠져나가면서 밀도가 희박해지고 그로 인해 뜨거워진다거나-그는 공기의 밀도에 의해 사물의 온도가 정해진다고 보았다.-하는 사례들을 들었다. 즉 사물의 속성이 공기의 밀도에 지배된다는 것이다. 더 추측해보자면, 공기가 물 등의 다른 원소에 비하면 질적 특성이 옅어 보인다는 점도 그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기는 물과 무한정자의 중간에 있는 무언가이고, 이를 통해 두 선학들의 의견을 봉합했다고 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 무엇을 포착할 수 있을까? 우선 세상을 인간의 감각과 이성을 통해 해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달려드는 과정에서 이전과 달리 신 등의 미신적인 것들은 배제하였다.-즉 미토스적 요소를 배제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나름의 답을 논리적 체계를 갖춘 논증으로써 제시했다. 이에 따라 반대자들 논리적 체계를 갖춘 논증으로 대응했다. 보다시피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 역시 탈레스처럼 나름의 근거와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논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설파했다. 체계적인 것은 이들의 논리만이 아니었다. 이들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고 설득하는 과정 역시 퍽 체계적이었고, 어떠한 불합리한 권위를 이용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밀레투스학파가 닦은 철학적 전통이자 학문적 전통이다. 풀어쓰자면 학문적 전통이란 합리적인 논증을 통해 체계적으로 반대자를 비판하고 설득하는 과정이다. 이런 미덕은 오늘날까지도 모든 학문의 최소조건으로 남아있고 미래에도 불변할 것이다.
우리는 밀레토스 삼총사의 주장과 그 흐름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탈레스는 만물이 물이라고 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이 특정한 속성을 가진다는 것 논증의 논리적 한계를 눈치채 아페이론을 구상했다. 아낙시메네스는 그의 선배가 아르케를 과도하게 추상적인 무언가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페이론보단 덜 추상적인 공기를 아르케라고 주장하였고, 선배들과 달리 아르케가 어떻게 세상을 이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도 처음으로 제시했다. 이는 아르케를 보다 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들의 주장 역시 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들이 진행한 일련의 지적과정에는 현대에도 유효한 시사점이 있다. 이 과정에서 학문이라는 것이 탄생했고, 학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단서가 내재되어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바로 합리적인 논증을 통해 체계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비판하는 과정, 이들이 인류에게 준 선물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주장이 참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다. 그들의 태도와 방식, 의의에 집중하고 선물에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