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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Apr 17. 2024

이제 자살을 이야기할 때,

24.04.17 단상

 자살을 터부시하는 것은 사회적 부조리를 터부시하는 것과 같다.



 자살은 사회적 부조리의 현현이다. 에밀 뒤르켐이 서술하였듯, 사회적인 영향 없이 생리적으로나 정신병적인 이유로 스스로의 삶을 마감하는 경우도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자살이라는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은 뭐니뭐니해도 사회적 요인이다. 자살은 사회적 부조리의 현현이다.


 필자가 문제로 삼고 싶은 일은 사회가 자살 자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터부시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자살은 슬픈 일이다. 베르테르 효과도 실존한다. 우리는 이런 비극이 초래되지 않게 방지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정녕 자살자와 자살에 대해 침묵하는 일일까? 충분히 건전한 사회였다면 베르테르는 힘을 쓰지 못했으리라. 우리는 차라리 자살에 대해 논의해야한다. 자살은 자살자의 마지막 의사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런 극단적인 방법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이유는, 이전까지 시도했던 자신들의 의사표현이 사회적으로 무시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외받았다.


 사회구성원 각각이 자살에 대해 책임과 과오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마지막 의사표현마저 져버릴 권리가 있을까? 이건 주검을 사진으로 촬영해 뉴스나 신문, sns 등에 공개하라는 뜻이 아니다. 각각의 자살 현상이 현재의 어떠한 부조리가 표상된 것인지 분석하고 그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다. 현상의 전후 맥락에 있던 모든 것이 자살자의 언어다. 어떤 수단을 사용했는지에서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죽기 전에 누구에게 연락을 했는지, 했다면 어떤 언행을 보였는지. 그 모든 것이 자살자들의 발화였다.


 현재 자살을 막기 위해 사회가 벌이는 일련의 활동들은 충분히 효과적인가? 사회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관심을 보이고 있는가? 확실한 건 둘 다 아니다. 자살을 사회적 문제로 알음알음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그 수가 충분해 보이진 않는다. 최소한 이 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할 정도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진 않다.  


 우선 우리 사회는 자살과 우울증, 정신병 따위를 부정했다. 이 부정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의 차원을 넘어 "그것은 존재해선 안된다."의 차원으로 존재했다. 정신병은 배부른 자들의 질병이나 의지가 박약한 자들이 물리적 폭력을 충분히 겪지 않아서 걸리는 꾀병 정도로 여겨졌다. 또 다수의 사람들은 아직도 그렇게 여기고 있다. 사회적 부조리 역시 어떤가?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매국노가 되어야 했다.


 오늘날, 이러한 부정은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근래에 대두되었었던 유행어, "누가 칼 들고 협박함?"가 그런 양상을 잘 보여준다. 모든 사회적 문제는 개인적 문제로 치환되었다. 사회적 문제는 개인들의 능력 부족이나 노력 부족, 혹은 판단력 부족으로 치부되었다. 자살과 우울증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다뤄지고 있다.


필자는 죽은 자들을 추모하고 싶다. 하지만 그 추모를 단순히, 마음속에 담아두고 애도하는 것으론 부족하다고 느낀다. 영정사진 앞에 서 국화를 두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해야 할 추모는 더 이상 같은 이유로 스스로의 삶을 끊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가장 부조리한 일은 설령 오해로 라고 해도 언급조차 되지 못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어떠한 긍정적인 기대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살의 순환과 지속을 막기 위해선 우선 자살에 대해 언급해야한다. 모든 진보는 그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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