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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rry Dec 01. 2021

여성학 관점에서 본 마네의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

감독: #카롤린느샹페띠에


출현:

#베르트모리조 #모리조 #마린느델테르메

#에두아르마네 #마네 #맬릭지디

#에드마 #앨리스부토드


등급: [국내] 12세 관람가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99분








'미술가로서의 여성'을 주제로 이야기하기 앞서,

얼마나 현 영화가 예술가를 위한, 미술을 향유하고 즐기는 사람을 위한

영화 인지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다.



미술을 잘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 불친절했던 영화

    

    영화는 베르트 모리조와 그녀의 언니인 에드마가 마네의 <올랭피아>를 보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사회적인 이슈를 일으켰던 마네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이러한 영화의 전개가 당황스러웠다. 필자는 수업을 통해 마네와 베르트 모리조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있은 상태에서 영화를 봐서 이러한 마네의 스토리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트 모리조를 모르는 사람, 마네를 모르는 사람, 미술(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 등의 일반 시청자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정말 불친절한 영화였을 것이다. <올랭피아> 작품에 대한 어떠한 기본적인 설명도 안 해준 채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일반 시청자가 마네를 꺼리는 당대 사회적 분위기를 이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왜 당대 <올랭피아> 작품이 이슈였는지, 마네가 왜 이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했는지에 대한 설명없이 시작되는 영화 서사는 미술을 향유하는 계층만을 위한 영화라고 느껴질 정도로 불친절 하다고 느껴졌다.


왜 마네는 <올랭피아> 작품으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을까

    

    영화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올랭피아> 작품에 대한 설명과 왜 이 작품으로 마네가 사회적으로 스캔들 메이커가 됐는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Manet, <올랭피아>, 1863


    이 작품이 당시 살롱전에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올랭피아 라는 여성인물 자체가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몸을 파는 매춘부 여성이었고, <올랭피아>는 이를 소재로 그린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살롱전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프랑스의 상류층인 부르주아 계층의 남성들이었는데, 이들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올랭피아라는 매춘부 여인이 이들에게는 불편했을 것이다. 예술 작품을 즐기고 문화생활을 하겠다고 한껏 꾸미고 살롱전에 왔는데, 자신들에게 몸을 팔았던 매춘부를 만나게 된 상황이 불쾌했을 것이다. 마네는 이러한 올랭피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매춘부의 몸을 비도덕적으로 거래했던 당대 귀족 남성들의 위선과 비도덕성을 폭로한 것이다.    

    더불어 올랭피아를 기존의 고전적인 누드 묘사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도 부르주아 계층 남성들이 <올랭피아> 작품을 보는데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상화된 8등신 비율의 여성의 몸으로 묘사한 것이 아닌, 팔다리를 짧게 묘사하고 피부는 매끄럽게 표현하지 않은 것을 통해 올랭피아 여성의 몸을 눈에 보이는 대로 현실적인 몸으로 담아냈다. 이러한 묘사는 부르주아 남성들에게 <올랭피아> 작품 속의 매춘부 여인이 더 현실적인 여인으로 다가오도록 했을 것이고, 더 불편감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올랭피아의 눈빛을 누군가를 유혹하는 눈빛이 아닌, 당당하게 관람자를 바라보는 강렬한 눈빛으로 묘사한 것을 통해서 <올랭피아> 작품을 보는 부르주아 남성들에게 당황스러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올랭피아의 묘사로 마네는 당시 예술향유 계층인 부르주아 남성들에게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미술가로서의 여성'을 주제로 미술과 성 그리고 권력에 초점을 맞추어 

<마네의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를 바라보고자 한다.



영화 제목이 왜 <마네의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인가


    원작 제목은 그냥 ' Berthe Morisot'인데, 한국어로 번역된 영화 제목은 왜 <마네의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르조>인가. 워낙 영화가 프랑스 예술 영화 느낌이 강하기에, 산업 영화의 느낌을 주기 위해 이렇게 제목을 지은 것일까. 일반 대중들이 베르트 모리조보다 마네를 더 잘 알기에 이렇게 제목을 지은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이러한 제목이 아무리 마네의 높은 인지도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기 위함이라고 해도, 충분히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제목을 바꿈으로써 시청자는 본 영화를 베르트 모리조 작가 중심으로 그녀의 삶을 들여다 보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여인으로 치부된 왜곡된 시선으로 베르트 모리조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마네를 마네 자체로 보듯이, 베르트 모리조도 베르트 모리조 자체로 봐야 하는데, 이미 베르트 모리조는 누군가의 여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베르트 모리조: 마네의 제비꽃 여인>이 아닌, <마네의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라는 것은, 영화 자체는 베르트 모리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면서 아이러니하게 제목에서는 마네를 전면에 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현대 영화 작품 제목에서 조차도 베르트 모리조라는 여성 작가의 이름이 영화 제목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마네라는 남성 작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읽혀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당대 19세기 여성 작가들이 남성 작가들에게 가려지고, 이들의 도움 없이는 미술 화단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현실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보여 진다.

    더불어 <마네의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라고 번역된 것을 통해 얼마나 우리가 베르트 모리조와 같은 여성 작가에 대한 인식이 낮은지에 대해 직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였다. 얼마나 베르트 모리조에 대한 인식이 낮았으면, 베르트 모리조가 중심인 영화에, 마네를 전면에 세웠을까. 이를 통해 여성 미술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결혼과 미술


    여자에게 결혼이 제일 중요하면, 왜 모리조 부모님은 모리조와 에드마에게 미술을 가르쳤을까. ‘그림을 그릴 때가 아니라, 결혼을 해야 할 때’ 라는 극중 모리조 어머님의 대사와 루브르 박물관에서 마네가 모리조와 에드마에게 ‘벽에 걸린 그림들을 봐요, 여자가 그린 건 하나도 없어요.’ 라는 대사는 당시 19세기 여성 화가들의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사였다. 아무리 화가로서 일을 하고 싶다고 해도 결혼을 하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이 안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특히 모리조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화가의 꿈을 이루고자 했기에, 결혼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사회에 살아가는 현실이 더 안타깝게 다가왔다. 이러한 당대 여성 화가들의 현실은 모리조의 언니인 에드마가 결혼을 하고 더 이상 그림을 못 그리는 상황이 그려지며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영화 후반부에서 결국 모리조도 결혼을 하는 모습을 보며, 당시 19세기 사회에서 결혼은 필수적인 요소였음을 다시 한번 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한 후에도 베르트 모리조는 계속해서 화가로서의 업을 이어 나갔기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결혼을 하면 화가로서의 일생은 끝날 수 밖에 없다는 사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꿈과 목표를 향해 끝까지 화가로서의 일생을 산 베르트 모리조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림에 열중하는 베르트 모리조 (영화장면)


권력과 미술


    영화 마지막에 베르트 모리조는 당대 이단아로 불리던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첫 전시회를 연다. 이렇듯 베르트 모리조는 그림을 계속해서 그리도록 지원해 줬던 가족과 예술가로서 영감을 주고받은 마네의 도움으로 주류 미술계로 진입한다. 모리조가 살아온 19세기는 이전 시대에 비해 여성 작가들이 많이 활동한 시기이기는 했지만, 여성 작가들의 활동 범위는 많이 제한적이었던 사회였다. 영화 속에서도 보여지듯이 모리조의 부모님이 모리조가 마네의 모델이 되는 것을 허락한 이유는 모네라는 당시 유명 남성 작가의 모델이 되는 것이 모리조의 화가 인생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봤기 때문인 것 처럼, 당시 19세기 사회는 여성 작가 혼자 명성을 얻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모리조는 마네라는 영향력 있는 남성 작가의 도움을 받아서 인상주의 화단에 진입한, 동시대 다른 여성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 운이 좋았던 화가로 평가되는지도 모른다. 평등한 경쟁 구도 속에서 베르트 모리조 작가의 재능을 입증 받았다고 보기 힘들다고 평하는 지도 모른다.


(왼) Manet, < 베르트 모리조 >, 1872/ (오) Manet, < 발코니 >, 1868 69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트 모리조가 훌륭한 여성 화가인 이유는 마네의 도움으로 주류 미술계에 진입은 하지만, 이 주류 미술계 안에서 베르트 모리조라는 이름을 알리고 확고히 자리를 잡은 것은 베르트 모리조 작가 자신이 화가로서 열심히 생활했기 때문이다. 주류 미술계 안으로 들어가는데 있어서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이 안에서 많은 남성 작가들과 교류하고 소통하고 경쟁하며 결혼 후에도 지속적인 작가활동을 이어 나가고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내, 후원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것은 다 베르트 모리조 작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기에, 여성 작가로서 베르트 모리조 작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할 가치가 있다. 



끝으로, <마네의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 영화의 

전반적인 느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영화 중간중간 작품들이 나올 때 마다, 제목과 작가를 같이 보여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닌, 도슨트를 들으며 전시를 보는 기분이었다. 잘 모르는 작가의 전시를 처음 볼 때, 그냥 전시를 볼 것인가, 도슨트를 듣거나 부가적인 설명을 읽으면서 전시를 볼 것이냐는 상당히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다. 도슨트를 안 듣는 이유 중 하나는 도슨트를 듣고 작품을 보면 나도 모르게 설명 내용에 집중해서 보게 돼서, 나만의 작품 감상을 못하게 되기 때문인데, <마네의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는 이러한 도슨트의 아쉬움을 보완해 줬다. 전체적인 영화의 스토리는 작가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로, 작가의 작품을 보는 시야를 넓혀줬고, 작품이 나올 때, 작가명과 작품명만 알려주고 작품에 대한 설명은 거의 해주지 않아서 각각의 작품에서의 조형적인 요소에 대한 해석은 영화를 보는 관람객에게 넘겼다. <마네의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는 한 편의 영화를 보며 하나의 전시를 관람한 느낌을 받은 신기한 경험을 한 영화였다. 


    또한 마네가 얼마나 <올랭피아> 그림으로 사회적으로 이슈였는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수업시간에 들었던 시대적 배경을 이렇게 영화로 남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더불어 베르트 모리조라는 여성 화가의 생애에 대해 공감하고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본 영화는 영화 제목에서 여성학적인 한계를 드러내지만, 일반 시청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여성 화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여성 미술가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의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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