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꽃비원
3월 초에 도착한 꽃비원에는 아직 겨울의 찬 기운이 남아있는 자두나무와 꽃봉오리만 겨우 맺힌 목련이 있었다. 딸기와 육군 훈련소 외에 별다른 이미지가 떠올려지지 않던 나에게 실제로 마주한 논산의 첫인상이었다.
농부님께서 따뜻한 인사로 맞아주셨고, 월-수에는 농장에서, 목-토에는 키친에서 일할 계획이라고 하셨다.
농장의 일상은 평범했다. 일하고, 요리하고, 먹고, 쉬고. 별 거 아니지만 굉장히 별난 일상이었다. 사실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일상 아니던가. 중간 과정 어딘가 빠져있던 일상에 익숙한 나에겐 특별한 경험이었다.
농장에서 일하던 첫날엔 콩을 심기 위해 밭을 정비하고, 풀을 뽑았다. 3시간도 채 되지 않아 어엿한 콩밭이 되었고, 일정한 간격을 두어 콩을 심었다. 나의 첫 작물 심기였다. 잠시 후 새참을 먹었다. 직접 캔 쑥으로 만든 쑥떡과 직접 기른 콩으로 만든 콩고물. 평범한 메뉴였지만 평범하지 않은 첫 새참이었다. 왠지 모르게 진짜 농부가 된 것처럼 설렜다. 겪어보니 여기서는 웬만하면 직접 기른 식재료로 먹을 수 있었다. 꿈꾸던 농장 생활을 실현하며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더욱 강하게 다짐했다.
키친에서 일하는 날에는 주로 매장 청소와 식재료 다듬기를 담당했다. 테이블과 바닥을 청소하고, 수프에 쓰일 당근과 단호박을 다듬고, 신메뉴 ✨시식✨을 했다. 사실 키친에서는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한정적이었다. 매장 정리를 한 후에는 주로 요리를 하거나, 먹거나, 먹는 얘기를 하거나, 카페 분위기를 즐기는 등 먹는 일로 가득한 일상을 보냈다. 이곳에 계속 머무르면 건강하고 행복한 돼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쉬는 시간이 생기면 근처 걷기 좋은 곳으로 놀러 가곤 했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기도 했고, 산책길을 따라 견훤왕릉에 다녀오기도 했다. 쉬는 날에는 다 같이 부여에 놀러 갔다. 부소산성에서 백마강의 경치를 감상하고, 사랑나무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 성흥산성에 올라 사진도 찍고, 독수리의 위엄 있는 날갯짓도 감상했다. 아담하고 길게 이어진 부여의 산줄기가 매력적이었다. 일하는 날이건 쉬는 날이건 우리는 농장을 운영하는 평범한 가족처럼 하루를 온전히 함께 보냈다. 먹고, 놀고, 요리하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시간을 보냈다.
먹고, 노는 시간 동안 우핑을 다니며 얻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농사를 배우고, 자연과 가까이 하는 삶을 배우고, 다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듣는 것. 지금 먹고 노는 것이 그냥 놀이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닌, 내 인생에서 귀한 흙이 되어줄 시간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생물 가득한 흙. 이것이 자양분이 되어 앞으로 걸어가는 길에서 큰 힘이 되어줄 거라 믿는다.
당분간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함께 일하면서 우리는 정말 한 팀이 된 것 같았다. 누군가 삽질을 하면 콩을 심고, 누군가 냉이를 캐면 냉이를 다듬어 요리를 하고, 누군가 쇠파이프를 자르면 수세미 밭에 고정했다. 내가 못하는 것을 누군가는 할 수 있었고, 서로의 도움으로 어엿한 수세미 밭이 완성되었다. 꽃비원을 돌아보니 여러 사람의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아버님께 얻어온 장비들, 지나간 여러 사람들이 심고, 키웠을 농작물, 인테리어부터 소품 하나하나 따스한 도움의 손길이 느껴지는 키친까지. 여러 흔적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농장, 그곳에 모인 흔적들만큼 농부님들도 따뜻했다. 나도 그 흔적에 손을 보태고 싶었다.
놀이공원에 온 것처럼 즐기는 동안 약속했던 2주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콩을 심고, 수세미 밭을 만들고, 사진을 찍으며 우리의 흔적을 남겼다. 이 농작물들이 자라면 함께 나눈 이야기와 서로의 꿈들을 생각해주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