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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Aug 12. 2022

제12화 아침을 깨우는 정겨운 소리

Najera~Santo Domingo de la Calzada

#철이의_산티아고_순례길 

#걷기 9일 차

#나헤라(Najera)~산토 도밍고 데 라 칼자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21.88km / 5시간 50분

#숙소: Albergue Confradia del Santo(€13, 다인실)


붉은 벽돌의 수도원 

8월 2일, 06:40, 현재 기온 16도, 나헤라에서 9일 차 걷기를 시작한다. 오늘은 산토 도밍고 델라 칼자다까지 가는 21km 정도의 길지 않은 코스다. 숙소에서 골목길을 돌아서 산티아고 길을 따라 나오니 빨간 벽돌로 지어진 커다란 건물이 보인다. 왕립 산타 마리아 수도원(Monastery of Santa María la Real)이다. 이곳 마을 뒤쪽으로 돌산이 보이는데 붉은색 퇴적암이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에는 붉은 벽돌이나 암석으로 지은 건물이 많다. 이 수도원도 전체가 붉은빛이다. 1052년 지어졌고, 15세기에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이 수도원의 기원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044년 가르시아 왕이 사냥을 나가 꿩을 발견하고는 사냥매를 앞세워 따라 들어간 동굴에서 백합 화병과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종과 등불도 있었다고 한다. 얼마 후 가르시아 왕은 이슬람교도에게 빼앗겼던 땅을 되찾고는 동굴에서 본 성모 마리아의 은덕이라 생각하고 이 수도원을 지어 봉헌했다는 이야기다. 수도원에 있는 제단화에는 가르시아 왕이 보았다는 등불, 백합화병, 종이 묘사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른 아침이라 들어가서 확인해 보지 못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면 이런 아쉬운 일이 종종 생긴다. 


길은 의외로 초반부터 힘들다. 어제는 동키 서비스로 큰 배낭 하나를 미리 보내서 가벼운 배낭을 아내와 번갈아 메고 걸어서 편했는데, 하루 쉬고 다시 멘 배낭에 몸이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 무거운 짐의 무게를 마음보다 몸이 더 빠르게 알아차리는데 놀란다. 길이 좀 힘들다 싶은데 숙소 뒤쪽으로 산을 하나 넘어간다. 배낭의 무게가 새롭기는 하지만, 아침 공기가 시원하고 다리도 재충전을 한 상태이니 이 정도는 가뿐하다.


지금 시간 08:00, 1시간 20분을 걸어와서 6km 지점에 있는 아소프라(Azofra) 마을에 도착했다. 길가 카페에 순례자들과 동네 사람, 경찰들이 모여서 아침 식사 중이다. 이른 아침에 이런 풍경은 참 정겹고 다정하다. 달콤한 커피 향, 바스락바스락 바게트 씹는 소리, 커피 홀짝이는 소리는 아침을 깨우고 하루를 시작하는 소리다. 심지어 나이 많은 주인 내외가 손님 맞이에 바쁘면서도 틈틈이 실랑이하는 소리도 왠지 정겹다. 두 사람 분위기가 손님들이 다 떠나고 한가할 때 한바탕 할 것 같기는 하다. 

통증은 찾아오고

한참을 걷다 보니 저 앞에 '수다쟁이'가 절뚝거리며 간다. 한쪽 다리에 보호대도 찼다. 늘 남자를 옆에 달고 다니던 작은 체구의 프랑스 사람이다. 프랑스 바욘 역에서 휴게실 벽에 꽂아 둔 내 충전기를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쓰던 여자라 처음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바욘 역에서 생장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도 앉자마자 옆에 앉은 남자와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하던 붙임성이 대단한 친구다. 프랑스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탈리아에서 왔단다. 이름은 마르타. 사는 도시 이름도 들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6주 휴가를 받아서 콤포스텔라까지 완주할 계획이란다. 오늘은 같이 다니던 남자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혼자라 좀 쓸쓸해 보인다.(오후에 숙소에 와서는 다시 옆에 남자를 셋이나 거느리고 다닌다.) 콤포스텔라까지 완주할 거라는데 저 다리 상태로 가능할까 싶다. 


며칠 걷다 보면 누구나 여기저기 몸에 이상이 생긴다. 걷기를 시작한 지 삼사 일이 지나면 근육에 신호가 온다. 종아리, 허벅지를 거쳐서 허리에도 통증이 오고, 배낭은 멘 어깨 부위도 불편하다. 근육통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근육통은 어느 정도 적응을 하는데, 발바닥이 문제다. 무거운 배낭 무게 때문에 하중이 발바닥에 모여서 그런지 제법 두꺼운 트레킹화 바닥이 얇게만 느껴진다.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찢어질 것 같다. 발바닥 통증 때문에 걸음걸이가 조금 달라지고, 그러다 보면 발바닥이나 뒤꿈치 쪽에 물집이 생긴다. 한번 생긴 물집은 여간해서 치료가 안된다. 처음부터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최선이다. 


알베르게에서 만난 친구들 상태를 보면 대개 물집 때문에 고생을 한다. 걷기 초반에는 운동화나 등산화를 신고 다니다가 어느새 슬리퍼로 갈아 신고 걷는데, 물집 때문이다. 발뒤꿈치에 생긴 물집 때문에 신발을 신을 수가 없다. 물집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5km나 한 시간 정도 걸은 후에는 양말을 벗고 발을 말려 주는 게 좋다. 걸으면서 신발에 생긴 습기와의 마찰 때문에 통증과 물집이 생긴다. 출발하기 전에 물집이 생길 것으로 예상되는 부위에 스포츠 테이프를 바르고, 발 전용 바셀린을 발라주면 물집이 잘 생기지 않는다. 1차 순례 때는 물집이 생겨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2차 때는 예방 규칙을 잘 지킨 덕분인지 발에 아무 이상 없이 잘 걸었다. 


산토 도밍고의 전설

아소프라 마을 이후 10km 구간은 그늘도 없는 시골 비포장도로다. 추수가 끝난 밀밭, 간간이 보이는 포도밭, 일부러 불을 질러 태운 새까만 밀밭,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파란 하늘과 어쩐지 어색한 새까만 들판, 들판을 가르는 누런 황톳길. 몇 가지 색깔 만으로 예술가의 심오한 사상을 표현한 하나의 현대 추상화 같은 풍경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솔개 한 쌍이 빙글빙글 맴돈다. 이런 들판에 먹을만한 들쥐가 있기는 할까. 길가의 잡초들도 억세어 보인다. 비가 안 온 지 한참 되었는지 흙은 말라 먼지가 날리고, 그 먼지를 뒤집어쓴 잡초는 말라비틀어져 날카로운 가시만 쫑긋 세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이런 열악한 날씨에도 생명을 유지하고 버티어 내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수십 수백만 년을 이어온 적응의 결과인가, 아니면 창조주의 선물인가. 


2km가 넘는 긴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왔다. 정상에 올라오니 조그마한 쉼터가 있다. 식수도 있다. 그늘 벤치에 앉아 포도, 복숭아와 맛살도 두 개 먹고 원기를 회복한다. 이제 남은 거리는 7km다. 마을이 보이는 곳에서부터 길의 왼편으로는 푸른 잔디밭이다. 스페인에서 처음 보는 골프장(Rioja Alta Golf Club, 그린피 55유로)이라 잠시 들어가 본다. 잔디 관리도 잘 되어 있다. 그런데 라운딩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곳보다 더 뜨거운 카이로나 방콕에서는 다들 열심인데 스페인은 더울 때는 골프도 안 치나 보다. 하긴 시에스타(Siesta)라고 더운 오후에는 어디든 문을 닫고 낮잠을 자는 문화가 있는 나라인데 이런 땡볕에 골프라니, 말이 안되는 일이다. 


골프장이 있는 시루에나(Cirueña)를 지나자 다시 오르막이다. 그 길 끝에서 보니 저 멀리 산토 도밍고 마을이 보인다. 산토 도밍고라는 마을 이름은 이 도시를 세운 도밍고 가르시아(Domingp Garcia)에서 따온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도밍고는 1019년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목동인데,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고자 애를 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다. 강둑이 있는 숲 속에서 홀로 은둔자 생활을 하다가 강을 건너려는 순례자들을 돕기 위해 다리를 놓고, 길을 정비하고 나중에는 숙소도 마련하는 등의 헌신으로 성인으로 추앙받게 된다. 


대성당 안의 산토 도밍고 묘지 앞에는 특이하게도 살아 있는 닭이 있는 닭장이 있다. 여관집 딸의 사랑 고백을 받아 주지 않아 억울한 누명을 쓴 청년의 목숨을 구해 준 산토 도밍고, 그의 진심을 밝히는 역할을 했던 닭의 사연이 담겨 있다. 이런 스토리의 전개는 이솝우화나 우리의 민담에서도 종종 보게 된다. 그래도 묘지를 지키는 닭이라는 실체는 신기하기만 하다. 


오늘 묵을 알베르게가 대성당 바로 옆인데, 내일 새벽에 닭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나... 짐을 풀어놓고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가니 바로 앞이 카페다. 닭다리 요리랑 새우구이를 주문하고 시원한 맥주를 한잔 들이켠다. 바로 이 맛이다. 성 야고보 님은 포도주 맛은 알았어도 이 시원한 맥주 맛은 몰랐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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