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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Aug 12. 2022

제11화 걷는 속도만큼 삶이 느리게 간다

Logrono~Najera

#철이의_산티아고_순례길

#걷기 8일 차

#로그로뇨~나헤라(Najera)

#31.17km / 8시간 13분

#숙소 : Albergue Puerta de Najera (€40, 2인실, 화장실 별도)


배낭은 동키로 보내고

굿모닝~

오늘은 8월 1일, 월요일, 벌써 8월이다. 걷기 8일 차를 시작한다. 아침 기온 18도, 현재 시각 06시 44분. 오늘 출발이 좀 늦었다. 저녁 늦게까지 휴게실에서 맥주 마시고 노느라고 늦게 잔 탓이다. 휴게실에 있던 스페인 분이 꽈리고추 볶음(Pimiento de Padrón)을 해줘서 맛을 봤는데, 이게 또 별미다. 크기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꽈리고추보다는 훨씬 작다. 꽈리고추를 올리브기름에 태우듯이 볶고 소금 뿌려 조금 짜다 싶을 정도로 간을 맞추면 된다. 이걸 요리라고 할 수 있나 싶은데, 맥주 안주로도 그만이다. 


나헤라까지는 30km가 넘는 긴 거리다. 대개 하루에 걷는 거리를 25km 내외로 잡는데, 이렇게 긴 날도 1주일에 한 번 정도 있다. 이렇게 긴 코스를 걷는 날에는 무리하지 않는 좋다. 동키 서비스로 큰 배낭은 먼저 보내고 작은 배낭에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가면 된다. 혼자 다니는 사람도 작은 가방 하나는 미리 준비해서 장거리를 걸어야 하거나 몸이 좀 불편한 날에는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면 좋다. 요금은 2022년 당시에는 5유로였고, 2023년에는 6유로로 올랐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가까운 사리아(Saria)부터는 요금이 4유로다. 


혹시나 배낭이 제대로 배송되지 않거나 분실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용해 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동키 서비스를 하는 회사도 여러 개가 서로 경쟁을 하고 있고, 정확하게 문제없이 배송이 잘 되니 안심해도 된다. 이용 방법도 간단하다. 정해진 봉투(회사마다 고유의 봉투가 있음)에 5유로 넣고, 다음 목적지의 숙박 장소, 내 이름과 전화번호, 이메일을 적어서 문 옆에 두면 된다. 간혹 너무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면 배낭이 늦게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오후 2시 이전에는 배송이 완료된다. 


배낭을 메지 않고 걸으면 걸음도 빨라지고 발이나 다리에도 무리가 더 가서 훨씬 편하다. 길 위에서 만난 방작가는 독자들에게 진심을 전하기 위해 무거운 카메라 가방까지 20kg이나 되는 배낭을 매일 메고 걸었고, 중국 갑부 지훈이는 그 돈을 아껴서 좋아하는 요플레와 과일을 사 먹기 위해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2차 순례에서 만나 부산싸나이 두 분은 매일 동키서비스를 이용하는 대신 아침과 점심 식사를 삶은 달걀과 콜라 한 잔으로 버텼다고 한다. 


걷는 재미

로그로뇨는 제법 큰 도시라는 걸 도심을 빠져나오는 거리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숙소에서 3.5km를 걸어 도심을 빠져나오고, 거기서부터 다시 2.5km 동안은 도시 외곽의 공원을 걷는다. 길이 잘 정비되어 있고 가로수도 높다랗고 풍성하게 자라서 그늘을 드리워준다. 그래서인지 아침에 조깅하는 사람도 많이 보인다. 30대 나이에는 저 사람들처럼 달리기에 취미를 붙여서 달리기 대회에도 자주 나가곤 했다. 마라톤 풀코스는 뛰어 보지 못했지만 하프코스(21.0975km)를 두 시간에 이내에 뛴 기록도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새 점점 운동에 게을러지고 체중은 불어나 전형적인 중년 아저씨가 되고 말았다. 


걷는데 재미를 붙인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방콕 생활 3년째인 2021년에는 혼자 지내게 되었는데, 운동을 열심히 하겠다고 방콕 시내 룸피니 공원 옆으로 이사를 했다. 1년에 몇 번이나 공원에서 운동을 하겠냐면서 한국으로 먼저 돌아가는 아내는 통 믿지를 않았다. 하긴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코로나 때문에 걷기에 재미를 붙였다. 방콕 코로나가 심해 도심 전체가 락다운이 되고, 식당도, 카페도, 학교도, 공원도 폐쇄가 된 상황이라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숙소에 있는 헬스장과 수영장도 사용금지. 방 안에만 갇혀 지내야 하는 상황이 답답해 마스크를 쓰고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숙소 건너편에 있는 왕립 방콕 골프장과 쭐라롱콘 대학교(Chulalongkorn University) 담을 따라 걸었다. 골프장은 물론이고 대학교 구내도 출입금지였다. 처음에는 4~5km 정도를 걷다가 점점 거리가 늘었다. 그러다가 공원 이용이 가능해지고, 대학교 교정도 걸을 수 있게 되자 걷기가 더 재밌어졌다. 좀 길게 걸을 때는 짜오프라야(Chao Phraya River) 강변에 있는 왕궁(Wat Phra Kaew)과 강 건너 새벽사원(Wat Arun)까지도 걸었다. 주말에는 야시장으로 유명한 짜뚜짝(Chatuchak) 시장까지 왕복 20km가 넘는 길을 걷기도 했다.


걷는 건 배 나온 중년에게 더없이 좋은 운동이다. 중년뿐만 아니라 누구나에게 좋은 운동이다. 준비과정이 필요 없고 운동화만 신으면 바로 할 수 있다. 허리나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 천천히 또는 빠르게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가면서 하면 된다. 무엇보다 좋은 건, 걷을 때는 평소에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점이다. 사람 사는 모습, 도시의 매연과 음식 냄새, 낯선 소리, 웃고 떠들고 싸우는 사람들의 일상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자신이 걷는 속도로 삶이 느릿느릿하게 흘러가고 내 삶의 속도로 따라 느려진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도심을 빠져나왔다. 6km 지점에 큰 호수가 있다. 호수를 지나면서 다시 오르막, 여기서부터 쉼 없이 14km를 더 걸어, 벤토사( Ventosa)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에 오아시스 같은 카페가 있다. 여기서 한동안 보이지 않던 중국인 두 아가씨, 왕수다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아마 그들에게 나의 별칭은 ‘안녕하세요’인가 보다. 중국 상해에서 왔고, 35일 일정으로 콤포스텔라까지 이번에 완주할 계획이란다. ‘왕수다’는 걸으면서도 계속 중국말로 쉴 새 없이 말한다. 그래서 왕수다다. 배낭도 작지 않은데 걸음은 엄청 빠르다. 숙소에 가면 먼저 도착해 있고, 도착해서는 또 다른 젊은이들과 어울려서 큰 웃음소리가 난다. 작은 알베르게에 같이 머물게 되는 건 피하는 게 좋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걸었다. 아직 10km는 더 가야 한다. 그래도 무거운 배낭이 없어 다행이긴 한데, 발걸음은 가볍지 않다. 8시간을 걸어서 드디어 나헤라에 들어온다. 구글 검색을 해서 슈퍼마켓을 찾아 과일과 포도주 한 병을 샀다. 오랜만에 고기맛도 볼겸 구이통닭도 한 마리 샀다. 포도주와 통닭만으로도 근사한 저녁상이 차려진다. 넉넉히 배를 채우고, 숙소 바로 앞에 잔디밭으로 내려갔다. 벤치에도 좀 누워보고, 강물(Najerilla River)에 발을 담근다. 오래 걸어 붓고 열기 가득한 발이 강물에 천천히 식어간다. 한낮의 뜨겁던 태양도 붉게 타들어가며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고 그 자리를 시원한 바람과 어둠이 차지한다. 그렇게 나헤라의 늦은 오후가 발갛게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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