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정철 Aug 09. 2022

제10화 환생에 관하여

토레스_델_리오~로그로뇨(Logrono)

#철이의_산티아고_순례길

#걷기 7일 차

#토레스_델_리오~로그로뇨(Logrono)

#22.21km / 6시간 53분(06:04~12:57)

- 누적: 171.73km

 #숙소: Winederful Hostel(€17), 벙크형 2층 침대, 다인실


중세의 가을

지금 시각, 06시 04분, 기온 17도. 토레스 델 리오에서 7일 차 걷기를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로그로뇨까지는 20km 조금 넓은 거리라 짧은 코스에 속한다. 원래 계획은 여기서 8km 이전에 있는 로스 아르코스에서 쉬고, 긴 일정을 소화하는 것이었는데 어제 많이 걸은 덕분에 오늘은 여유가 있다. 아침에 늦잠도 자고 여유를 부려도 된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벽 6시가 되기도 전에 방이 텅 비었다. 한낮의 더위 때문에 해뜨기 전 선선한 아침이 걷기에 좋으니 다들 일찍 출발한 모양이다. 


알베르게 뒤편으로 오르막을 올라가면 마을 공동묘지가 있다. 지나온 마을들도 대부분 마을 뒤쪽에 공동묘지가 있다. 한마을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자라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손을 낳고 그러다 태어난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묻히는 삶. 무덤 속에서 그의 자손들이 또 그 마을에서 새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흐뭇해하고 있을까? 아니면 한때 번성했던 마을에서 자손들이 떠나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며, 마음의 온기가 식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파할까? 그러고 보니 크지 않은 마을에는 죄다 노인들만 골목을 지킨다. 젊은이들은 어쩌다 보이는 정도다. 지나가는 우리에게 ‘부엔 카미노~’하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물통에 물을 채워 주던 사람도 모두 노인들이다. 사람이 없어지면 마을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현재 시각, 10시 58분. 거의 3시간을 걸어서 11km 거리에 있는 비아나(Viana)에 도착한다. 산타 마리아 데 비아나 성당 앞 광장에서 카페 콘레체 한잔을 주문하고 가지고 온 빵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다. 아침에 카페 손님이 많아 줄 서서 한참 동안 기다린다. 단골손님들이 많은지 누군가 들어와서 바에 앉으면 주인이 알아서 척척 챙겨준다. 여기도 죄다 노인들이다. 도시의 모습도, 성당도,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중세다. 하긴 나도 그 시절의 누군가가 걸었다는 길을 따라 이렇게 걷고 있지 않나. 


요한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 (연암서가, 2012)>에서 13세기 부흥기를 지나 노쇠해지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단계인 14, 15세기를 ‘가을’이라고 규정했다. 전성기를 지나 쇠락해 가는 시대라는 의미와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나아가는 시대’라는 의미로 ‘가을’인 것이다. 근대를 지나 현대에 사는 우리는 중세를 그리워하는지, 멀리서 찾아와 거리를 걷고 사진을 찍고 추억을 만든다. 영광과 쇠락, 빛과 어둠, 도시와 시골과 같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던 시대가 중세라는데, 그 빛과 어둠이 더 짙게 나뉘는 것은 오히려 현대가 더한지도 모른다.


미스터 타이완과 기럭지

순례길을 걷다 보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아주 가끔 국적이나 이름을 물어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눈인사만 한다. 길을 가다 또는 숙소에서 여러 번 만나게 되면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서로 반가워한다. 길을 걷다 발이나 다리가 불편한 걸 보면 가지고 서로 걱정해서 괜찮은지 물어봐 주고, 약이 필요하면 비상약을 나눠주기도 한다. 힘들 길을 걷는 사람들이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는 것이다. 


반가운 인사는 하지만 이름은 알 수 없으니 모르니 내 나름대로 별명을 하나씩 정해서 부른다. 아내와 대화를 할 때 이름 모르는 그 사람을 별명으로 부르면 서로 쉽게 알 수 있어서 좋다. 물론 본인들은 자기 별명이 무엇인지 모른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동네 슈퍼마켓 위치를  가르쳐 준 아저씨는 ‘슈퍼마켓’, 키도 덩치도 큰데 얼굴이 너무나 작은 옆 침대 그녀는 ‘외계인’, 뉴욕에서 왔다는 틀림없는 멕시코인 커플은 ‘미스터 뉴욕’, 숙소에서나 길을 걸을 때 쉼 없이 떠들어대는 대만 두 소녀는 ‘왕수다’이고, 첫날 피레네산맥을 넘을 때 만나 계속 같이 걷는 한국인처럼 생긴 대만 친구는 ‘미스터 타이완’이다.

가브리엘 류는 하버드 대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하버드’, 키는 작지만 무척이나 다정한 부녀는 ‘아빠와 딸’, 어제 마드리드로 돌아간 셰퍼드 순례견 가족은 ‘히끼’, 키가 멀대같이 크고 늘 슬리퍼를 신고 혼자 순례 중인 스페인 청년은 ‘슬리퍼’, 60대 우아한 숙녀 두 분 중 한쪽이 키가 아주 크고 다리가 길어서 ‘기럭지’다. 로그로뇨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가 성당 안에서 ‘미스터 타이완’을 만났고, 길가 식당에서는 ‘기럭지’를 만났다. 다른 사람들도 아마 우리 부부의 별명을 정해서 부르지 않을까? 


맥주와 포도주에 취해

로그로뇨까지의 10km는 다소 지루하다. 심한 오르막이나 내리막 없이 잡목들 사이로 난 길을 걷다가 아스팔트길을 걷다가 다시 산길을 걷는다. 저 멀리 큰 도시가 보인다. 로그로뇨다. 예약해 둔 숙소는 15:00에 체크인이 된다고 해서 시간이 좀 빈다. 맛집 몇 군데를 검색해서 오늘은 스페인 음식 맛을 보자. 


먼저 찾아간 곳은 파가노스(Bar Páganos)다. 이 바는 Páganos 출신의 Jesús와 Resu 부부가 1960년에 설립한 '노포 식당'이다. 현재는 그의 아들과 손자가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62년 동안 숯으로 무어식 꼬치를 굽어 내는데, 핀초 모루노(Pincho Moruno)와 이베리코(Iberico)를 주문했다. 맛은 둘 다 고소하고 짭짤해서 술안주에 딱이다. 스페인어로 ‘모루노(moruno)’는 무어인을 뜻하며, ‘핀초(pincho)’는 핀초스라고도 불리는 바스크 지방의 전채요리를 뜻하는데, 음식을 꼬챙이에 끼워낸 형태를 띠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의 고기꼬치와 흡사하다. 


모루노(€2.2)는 양념을 한 돼지고기를, 이베리코(€3.0)는 양념하지 않은 소고기를 3조각씩 숯불로 구워서 내준다. 고기들 사이에 굵은 대파를 끼워서 같이 구우면 더 맛있을 거라고 한 수 가르쳐 주고 싶은데 말이 안 통하니 안타깝다. 가르쳐 준다고 해서 70년 전통이 바뀔리는 없지만.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양송이 구이집을 찾았다. 사람들이 엄청 많은 대박맛집, 엔젤(Bar Angel)이다. 바케트 조각을 맨 아래에 두고 구운 양송이를 3개 고치에 끼워 준다. 소금을 뿌렸는지 짭짤하다. 양송이 구울 때 생긴 물이 흐리지 않도록 한 입에 속 넣어 씹으면 참 별미다. 이걸 챔포(Champo)라고 하는데 1.5유로다. 리오하 포도주와 잘 어울린다.


맥주, 포도주 낮술을 했으니 약간 취기가 오른다. 얼른 씻고 자고 싶은데, 아직도 3시가 안 되었다. 성당 앞 광장 벤치에 누워 있다가 방랑객 독일인 '한스'를 만났다. 이 친구는 현재 3년째 여행 중이란다. 나이는 마흔두 살이고 같이 다니는 반려견은 '루나'다. 루나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새끼 때 만나서 3년째 같이 다닌다고 한다. 어설픈 영어로 ‘환생’을 주제로 한참을 얘기했다. 불교도는 아닌 듯한데 여행을 오래 해서 그런지 환생에 대한 생각이 사뭇 진지하다. 


사람이 죽어 다시 태어날지, 태어난다면 태국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착하게 살면 사람으로, 조금 잘못하고 살면 개로 태어날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게 착하게 살지 않은 내가 만약 개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한스의 반려견은 아니고 싶다. 루나를 보니 배고프고 힘들 것 같다. 순례길을 다 걷고 모든 죄를 용서받고 나면, 저기 성당에 계신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운좋게 천국행 티켓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가만 생각해 보니 천국도 별로지 싶다. 그동안 천국 간 사람이 너무 많아 거기서 사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다.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지, 벤치에서 햇볕을 너무 쬐어서 그런지 머리가 어지럽다. 1주일 순례길을 걸었다고 나도 도를 턴 건지도 알 수 없다. 잠깐 졸고 났더니 3시다. 나의 천국은 바로 저기, 알베르게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9화 이라체 포도주 농장을 지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