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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Aug 08. 2022

제9화 이라체 포도주 농장을 지나다

Estella~Torres del Rio

#철이의_산티아고_순례길

#걷기 6일 차

#에스테야(Estella)~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

#29.15km / 8시간 52분

#숙소: Hostel San Andres (€12)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

오늘 가장 길게, 오래 걸었다. 원래 계획은 에스테야에서 로스 아르코스(Los Arcos)까지 21~22km 정도 걸을 예정이었다. 내일 코스(로그로뇨까지 28km)가 길어 컨디션이 괜찮은 오늘 조금 더 걸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걸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겼다. 조금 더 걷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목적지 알베르게가 다른 일로 손님을 받지 않아 그다음 마을까지 갔다.


05:40에 기상. 더 일찍 일어나 준비하는 사람도 있고 여전히 잠을 청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많게는 한 방에 40~50명씩 자기도 하니 아침의 풍경도 제각각이다.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 이도 있고, 나중에 일어나서 아침까지 잘 챙겨 먹고 날이 환할 때 출발하는 사람도 있다. 늦게까지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으니 일찍 일어날 때는 조심조심해야 한다. 방에 불을 켤 수도 없어 짐을 두고 나오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짐을 챙기면서 너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도 해야 한다. 하긴 아무래 조심한다고 해도 낡은 철제 침대는 얼마나 삐그덕 거리는지… 아예 짐을 하나둘 방 밖으로 옮겨 복도나 휴게실에서 배낭을 싼다. 아침에 세수도 간단히 한다. 눈치 없이 아침에도 샤워한다고 호들갑을 떨면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게 되고, 샤워실이 침대방 내부에 있는 경우는 더 조심해야 한다.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다들 그렇게 한다.


주방으로 가서 어제 먹다 남은 야채에 레몬과 올리브기름을 뿌려서 아침을 대신한다. 요플레가 하나 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데, 옆 사람이 두고 가는 걸 보고 그럴 뿌려 먹으니 더 맛나다. 남은 치즈와 레몬 조각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왔다. 마트가 가까이 있어서 장을 보더라도 한꺼번에 다 먹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배낭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먹거나 다음 숙소에서 먹을 수도 있지만 날이 더워 상할 수 있고, 포도주 같은 경우는 무게가 나가니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먹을 만큼 먹고 남은 음식은 알베르게에 있는 냉장고에 넣어 두거나, 다음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따로 모아두는 곳에 두면 필요한 사람이 사용한다. 올리브기름, 쌀, 밀가루, 소금 등등 종류가 다양하다. 딱히 메모를 해 두지 않아도 눈치껏 알아서들 한다.


포도주 맛은 다음 기회에

07:00. 출발이다. 늘 아침은 싱그럽고 활기차다. 중세 분위기가 가득한 구도심을 지나오니 현대식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대부분의 도시나 마을이 이렇게 오래된 주택과 교회, 도로 등을 허물지 않고 보존하고 있다. 옛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과 건축물의 재료가 돌이기 때문에 화재나 자연재해, 또는 전쟁에도 잘 견디어 낸 이유도 있겠다. 김봉렬이 <김봉렬의 한국 건축이야기>에서 말한 ‘돌의 물성’ 덕분이다. 그는 책에서 우리나라의 건축물의 경우에는 주로 목재라 오랜 세월을 버텨온 건축물이 드물다고 안타까워한다.


도심의 끝에서 약간 오르막을 따라 올라가니 언덕 위에 조용한 주택가가 자리하고 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거리는 한산하고 조깅하는 사람들만 가끔 보인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고 길을 따라 내려오니 저 멀리 높다란 산이 있다. 혹시 ‘저 산을 넘어가는 건 아니겠지’ 하는 걱정을 하면 걷는다. 늘 불길한 예감은 들어맞기 마련인데, 오늘은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래본다. 길 양 옆으로는 넓은 포도밭이다. 저만치 큰 건물에 BODEGAS IRACHE라고 쓰여 있다. 무료로 포도주를 마실 수 있게 해 준다는 포도주 농장, 와이너리다. 입구 쪽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포도주가 나오는 수도꼭지가 두 개가 달려 있다. 빈 병이라도 있으면 한 병 가득 채워도 되겠다. 아쉽게도 아직 포도주가 나오는 시간이 아닌 모양이다. 포도주도 나오지 않은 꼭지에서 마치 포도주를 받아 마시고 입을 닦는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으니 사람들이 막 웃는다.

Bodegas Irache는 나바라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 중 하나다. 1891년에 설립되었지만 이미 10세기에 인접한 수도원에 살았던 베네딕회 수도사들이 같은 땅에서 와인을 생산했으며, 산티아고 순례자들을 위한 음식과 치료제로 잘 알려진 와인을 생산했다. 이곳 포도주는 나바라 왕가의 잔치에도 사용되고, 수도원에 살았던 승려들에 의해 프랑스와 포르투갈로 수출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맛을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쉽지만 갈 길이 멀다. 포도주 농장을 지나서는 산을 오른다. 다행히 오늘의 예감은 빗나갔다. 멀리에서 보며 걱정하던 높은 산으로 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둘러 나간다. 다음 마을 아즈퀘타(Azqueta)까지는 4.3km, 1시간 거리다.


빗나가지 않는 예감

하늘은 짙게 푸르고 하얀 뭉게구름이 그 아래 낮게 깔려 간간이 햇볕은 가려주니 걷기에 좋다. 바람도 살랑살랑 분다. 한국에서 올 때는 유럽의 살인적인 폭염 소식에 걱정을 하고, 막상 도착해서는 추위 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어제부터는 봄가을 마냥 날씨가 좋기만 하다. 오늘 코스는 경사가 심하지 않은 오르막 내리막 길이라 걷는 것도 편하다. 9.5km를 걸어 도착한 비야마요르 디 몬하르딘(Villamayor de Monjardin), 이곳에서 한국인 두 청년을 만났다. 대학을 갓 졸업한 두 사람은 내일 로그로뇨까지만 갔다가 파리로 가서 여행을 계속할 거라고 한다. 그들은 스물 다섯 나이에 온 곳을 나는 쉰 다섯 나이에 왔다.  


여기서부터 12km, 로스 아르코스 마을까지는 중간에 마을이 없는 들판을 걷는다. 물도 없고 그늘도 없고 쉴만한 곳도 없다. 그냥 걸어야 한다. 뚜벅뚜벅,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앞에 가는 사람을 지나치기도 하고 뒤에서 오던 사람이 먼저 지나가기도 한다. 걸음이 빠른 사람 느린 사람, 큰 배낭을 멘 사람 배낭 없이 걷는 사람, 혼자 걷는 사람 가족과 함께 하는 사람, 등산 스틱을 짚으며 바르게 걷는 사람, 나무 지팡이를 짚고 가는 사람, 모두들 제각각이다. 이렇게 걷다가 어떤 이는 일찍 쉬러 가고, 어떤 이는 더 먼 곳까지 간다.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걷는 방법도, 걷는 거리도, 걷는 속도도 제각각이다. 우리 사는 모양이 제각각인 듯.

학교를 생각해 본다. 아이들은 서로 다른데, 학교는 같은 걸 가르치고, 창의적 인재 육성을 외친다. 학부모도 제 아이만 다른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남들 하는 만큼, 다른 아이와 다른 것을 싫어하면서도, 내 아이는 남들보다 뛰어나고 잘 나기를 바란다. 참 이런 모순이 따로 없다.  


더위를 먹었는지, 몸이 지쳐 그런 건지, 배가 고파 그런 건지 어지러운 생각들이 마구 들고난다. 드디어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 산타 마리아 성당 앞 광장에 앉아 시원한 맥주도 한잔을 들이켜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오전 걷다가 만난 중국 청년은 일찍 도착해서 벌써 씻고 나와서는 반갑게 인사를 한다. 뉴욕에서 왔단다. 내일 로그로뇨를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한다. 같이 사진도 찍고, 페이스북 친구도 맺었다. 이름이 가브리엘 우라는 이 녀석은 하버드 학생이다. 옆 테이블에 앉은 미스터 뉴욕(멕시코 사람인데 여자 친구 따라온  뉴욕 맨이라고 해서 별칭을 그렇게 지음)에게 소개를 해 줬더니 둘이 쏼라쏼라 반갑다고 난리다. 광장 옆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데 로스 아르코스 성당에 들어갔다. 새 물건이라고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는 정말 오래된 성당이다. 숭고하고 성스러운 분위기가 주위를 감싸는 듯, 믿음이 없는 나를 무릎 꿇고 앉아 기도를 하게 한다. ‘계획한 날까지 무사히 마치게 해 주소서, 아멘~’


성당을 뒤로하고 산솔(Sansol)을 향해 걷는다. 이 길이 정말 힘들다. 이미 22km 이상을 걸은 데다가 이 길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늘도, 물도, 쉼터도 없다. 게다가 해가 가장 뜨거운 한낮이다. 그렇게 6km 정도를 걸어 드디어 목적지 알베르게에 도착. 예약은 미리 하지 않고 왔는데, 웬일인지 알베르게가 동네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주인장이 나오더니 오늘은 숙박이 안 된단다. 축제 중이라 밤새도록 시끄러워 불편할 테니 1km 정도 더 가면 알베르게가 있다고 알려준다. 높은 산은 넘지 않은 불길한 예감을 빗나갔는데, 예상치 못한 산이 남아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매일걷고매일쓴산티아고여행에세이

#산티아고길위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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