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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Aug 08. 2022

제8화 멀리서 아름다운 시로키(Cirauqui)

#철이의_산티아고_순례길

#걷기 5일 차

#푸엔테 라 레이나~에스테야(Estella)

#22.69km / 6시간 58분

#숙소 : Albergue de peregrinos de Estella (€8, 2층 침대)


축제를 기다리는 사람들

06:26. 푸엔테 라 레이나로 택시를 타고 다시 돌아온다. 택시를 타고 이동한다는 건 순례자에게는 호사다. 순례길에서 잠시 벗어난 길을 원위치로 돌아오는 길이므로 죄책감은 없다. 사실 숙소에서 다음 목적지인 에스테야로 바로 갈 수도 있었지만 순례길에 충실하고 싶어 거금 30유로를 들여 전날 도착한 지점까지 되돌아온다. 순례자 중에는 코스를 몇 구간 앞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소위 점프를 하는 경우가 있다. 영화 <나의 산티아고>에서 주인공 하페 케르켈링이 몇 번 점프를 한다. 몸이 아프거나, 물집 등으로 걷기가 힘들거나, 시간적인 여건이 안 되거나 할 때 그러기도 한다. 지독한 몸살감에도 굴하지 않고 계획대로 밀고 왔는데 그깟 돈 30유로에 굴복할 수야 없다.

 

차에서 노란 화살표를 찾아 골목 안으로 들어왔더니, 어제 축제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골목 구석구석에 쓰레기들이 쌓여 있고, 청소부들과 청소차가 들어와 정리 중이다. 소를 가두는 큰 울타리가 골목 안 공터에 마련되어 있다. 벌써 축제를 즐기러 나온 이들도 하나둘 보인다. 팜플로나의 산 페르민 축제에서 특이한 행사가 엔시에로(Encierro)라는 황소 달리기다. 아침 8시,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면 우리에서 풀려난 황소들이 골목길을 달려 투우장으로 달려가는데 사람들이 달려가는 황소 앞이나 옆에서 같이 달리면서 위험한 축제를 즐긴다. 팜플로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서도 비슷한 축제를 즐기는 모양이다. 


지나가는 골목길 양쪽으로 좁은 테이블이 길게 놓여있고 하얀 옷에 빨간 스카프를 메고 아침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수백 명이다. 곧 있을 황소 달리기에 참여할 사람들이다. 황소 몰이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지나가는 순례객들에게도 손을 흔들고 환호성을 지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이런 축제가 1주일간 이어진다. 제대로 즐기며 놀 줄 아는 사람들이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스민 레이나 다리(Peente la Reina)

골목 끝에 있는 레이나 다리(Puente la Reina)로 갔다. 가운데 부분이 살짝 솟은 고풍스러운 이 다리는 흔히 ‘여왕의 다리’라고도 불린다. 산초 3세 왕의 아내인 무니아도나 왕비는 순례자들을 위해서 아르가 강 위에 6개의 아치형 로마네스크 다리를 건설했다고 한다. 자선을 베푼 왕비의 고운 마음과 함께 아름다운 전설이 스며있다. 이 다리의 경당에 성모자상이 있는데 매일 작은 새가 부리로 강물을 떠 와 성모자상에 흘리고는 날개로 닦아주었다고 한다. 이 행동을 본 주민들은 성모자상을 '작은 새의 동정녀'로 부르며 매일 새를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스민 레이나 다리가 있는 이곳 푸엔테 라 레이나는 프랑스 아를에서 출발하여 송포르(Somport)를 거쳐 피레네산맥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만나는 아라곤강을 따라 이어지는 아라곤 길(Camino Aragones)이 이곳에서 프랑스 길과 만나게 된다. 아라곤 길과 프랑스 길이 만나는 작지만 역사적인 마을이다. 축제 참가자들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레이나 다리를 건넌다. 


기온은 18도, 한낮에는 27~8도까지 올라간다는 예보다. 오늘은 걷기 5일 중에서 컨디션이 가장 좋다. 몸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모양이다. 왼발 목사뼈 뒤쪽에 생긴 물집이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감기 기운도 없어지고 편도도 편안하다. 약간 흐린 날씨에 바람도 시원하다.


왕비의 다리를 건너서 좌측으로 돌아 도로를 건너면서 본격적인 걷기 시작이다. 3km 평평한 비포장도로를 걷는다. 걷기 초반에는 템포를 늦춰서 조금 천천히 걷는 것이 좋다. 몸이 서서히 열을 내고 엔진을 가동할 준비를 하도록 시간을 주는 거다.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그러고 나면 걷기가 훨씬 쉬워진다. 그런데 오늘은 30분이 지나고 나서부터 가파른 오르막이다. 1km 이상 오르막을 올라왔다. 엔진에 부하가 걸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숨이 목까지 찬다. 다리가 마른 땅속으로 푹푹 빠져든다. 한 시간 전의 좋은 컨디션은 온데간데없이 한 발을 꺼내 앞으로 옮기기가 힘겹다. 그래도 정상에 오르니 다음은 내리막이다.


멀리서 아름다운 시로키(Cirauqui)

5km 지점, 마네루(Maneru)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 골목 카페에 자리를 잡는다. 카페 콘레체와 하몽 샌드위치로 간단히 아침을 한다. 여기나 저기나 흥이 많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집시 같은 친구가 이른 아침에 골목 카페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커피를 마시다 말고 너도나도 일어나 손뼉 치며 흥겨워한다. 순례 중에 이런 친구들이 있어 좋다. 밋밋한 순례를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배낭도 힘들 텐데 기타까지 가지도 다니려면 얼마나 힘들까 싶어 고마운 마음이 더하다. 


마네루 마을 끝에 공동묘지가 있고, 돌아 나오면 바로 포도밭이다. 이곳부터는 포도주 생산지다. 포도밭 저 너머, 멀리 성 같은 게 보이는데, 자세히 보니 성이 아니라 집들이 모인 형상이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의 중간부터 정상까지 집이 빼곡히 차 있고, 앞의 넓은 흙길과 마을 너머 산맥의 기다란 절벽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그림에서 보던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어느 성을 닮았다. 그래서인지 이곳이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꼽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은 시로키(Cirauqui). 사실 오늘 순례 구간 중에 볼만한 단 하나의 풍광이다.


7.5km 지점, 멀리 보이던 시로키 마을로 들어선다. 이 마을은 가까이에서 보는 것보다 멀리에서 보는 게 더 아름답다. 마을 중간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어디선가 향긋한 빵 굽는 냄새가 발길을 잡아당긴다. 점심용으로 초콜릿 크루상 하나만 사서 나왔다. 많이 사면 남긴다. 나중에 길가에 앉아서 맛을 봤는데, 더 많이 사지 않은 걸 후회할 정도로 맛있었다.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을 잠시 올라오니 마을 뒤쪽이다. 성곽의 뒷문으로 나온 듯, 길은 뒤쪽 들판으로 길게 뻗어 있다. 그 길을 따라 무료하고 심심하고 따분하게 6km를 걸어 라르코(Larco) 마을에 닿는다. 물통에 물을 채우고 잠시 앉아 있다가 순례견 히끼를 다시 만났다. 어제 그 일행 중 큰아들 무릎이 안 좋아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동전 파스도 붙여주고, 방콕에서 사 온 특효 관절 약도 한 봉 줬는데, 오늘 보니 무릎 보호대를 했다. 아빠도 한쪽 무릎에 보호대를 찬 걸 보니 다들 힘든 모양이다.


히끼 가족은 오늘 마드리드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4일간의 순례를 마치고 다음에 다시 올 거라고, 히끼도 많이 지쳐 힘들어한다고 한다. 헤어지기 아쉬워서 히끼랑 사진 한 장 찍었다. 건강하게 잘 지내라. ADIOS AMIGO~ 히끼를 보내고 18km를 지난다. 역시나 조용한 마을 비야투에르타(Villatuerta)에 도착. 여기까지의 길도 심심하기 그지없다. 낮은 들판에 구름을 따라서 걷는 길, 그늘도 없고 햇빛을 마주하며 걷는 길이다. 어쩌면 이런 길이 콤포스텔라고 가는 진정한 길일까?


마지막 몇 킬로미터는 오늘도 힘들다. 어제의 멍청한 호사를 만회하는 마음으로 오늘은 소박한 공립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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