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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Aug 07. 2022

제7화 천천히 걸어서 끝까지

팜플로나~푸엔테 라 레히나(Puente la Rehina)

#철이의_산티아고_순례길

#걷기 4일 차

#팜플로나~푸엔테 라 레히나(Puente la Rehina)

#25.38km / 8시간 37분

#숙소 : Hotel Rural el Castillo, 55+10+30+30=125유로(2인실, 화장실 포함, 푸엔테 라 레히나에서 18km 떨어짐)


도심 카페에서의 모닝커피

걷기 4일 차. 현재 온도는 14도, 여전히 초가을 날씨다. 그래도 날씨가 맑으니 걷기에는 좋다. 오늘 이동 경로는 좀 긴 편이다. 전체 길이가 25km가 좀 넘는다. 팜플로나에서 시작해서 시수르 메노르(Cizur Menor), 페르돈 고개(Alto del Perdon)를 넘어서 우테르가(Urtega), 오바노스(Obanos)를 지나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가는 코스다. 안내 책자를 보니, 이 코스는 오르막도 많지만 내리막을 더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해발 770m인 페르돈 고개까지 13.2km 거리고, 나머지 절반의 거리는 내리막이다. 


07:33, 4일 차 순례를 시작한다. 약간 쌀쌀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하늘이 파랗게 맑다. 아침부터 날씨가 맑은 걸 보니 낮에는 더울 것 같다. 헤밍웨이가 사랑했다는 까스띠요 광장(Plaza del Castillo) 옆에 있는 카페 이루냐(Iruna)로 다시 갔다. 커피를 한잔하고 출발하려고 했더니 카페에 문이 닫혔다. 하긴 이런 이른 시각에 카페 문을 열 리가 있나. 전날 오후에 왔어야 했는데 몸이 아파 일찍 숙소로 들어가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헤밍웨이가 자주 와서 커피도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리던 곳으로 유명한 카페라 꼭 커피 한 잔 하고 싶었는데.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며 헤밍웨이의 글발을 좀 받으려고 했더니 안타깝네”

아내가 어이없어한다. 카페 문 위에 1888년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니, 이 카페가 134년이나 되었다는 뜻인가?


구도시 성곽을 빠져나오니 낮은 건물의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신시가지다. 한참을 걸어 나오다 카페에 잠시 앉아 커피와 크루아상으로 아침 식사를 한다. 이 나라 출근 시간치고는 좀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카페에 오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시골의 한적한 골목의 카페도 좋지만 이렇게 도심 한복판 큰 도로 옆 카페에 앉아 있으니 잠시 도시인으로 돌아간 듯하다. 출근 전에 모닝커피를 만끽하는 샐러리맨처럼. 


국립 나바라 대학교를 지나면서 서서히 도심을 벗어난다. 나바라대학교는 1952년에 설립된 사립대학이다. 2022년 현재, 재학생이 12,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부지가 굉장히 넓어서 마치 큰 공원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3km를 걸어야 도심을 빠져나가니 팜플로나도 제법 큰 도시임을 알겠다. 

5km 지점에 시수르 메노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마을이 조용하고 아늑하다. 지붕 낮은 집, 울창한 플라타너스 나무, 나이 들면서 자꾸 이런 곳이 마음을 끈다. 조만간 이른 은퇴를 하고 이런 마을에서 책 읽고, 여행 다니고, 글 쓰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렬해진다.

걸으면서 하는 걱정

걷기 4일 차인 오늘은 다른 날보다 걷기가 편하다. 허리와 허벅지, 장딴지의 근육통이 심했는데 제법 익숙해졌는지 통증이 덜하다. 배낭의 무게도 훨씬 덜 느껴진다.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동물이 인간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하긴 적응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길은 걸어야 하고 배낭은 짊어져야 하고 날씨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거늘. 몸도 마음도 주어진 환경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그래야 편해진다. 현재 기온은 19도. 


순례자의 길을 걷게 되면, 그 많은 시간 동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같이 걷는 아내와 대화도 자주 하겠지만 그러다가도 말없이 혼자 걷게 되는 시간이 많아진다. 걷기 시작한 지 몇 시간이 지나고 몸이 더위에 지쳐가면 말수가 적어진다. 힘들기 때문이다. 발바닥에서부터 전해오는 통증이 다리와 허리, 그리고 어깨로 이어져 온다. 그러면 오로지 걷는데 집중하게 된다. 생각이 줄어들고 한 가지, 걷는 것에 집중하는 무아지경? 그렇게 되지 않겠나 하고 상상을 했다. 


그런데 그건 또 아니다. 걸으면서 오히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온갖 상념과 걱정이 이어진다. 숙소 예약을 잘못해서 거기까지 어떻게 가나 하는 걱정, 목이 너무 아파 밤에는 좀 아프지 않고 잘 수 없나 하는 걱정, 물통에 물이 충분하지 않으니 어디쯤에서 식수를 구할까 하는 걱정, 발에 물집이 잡히지 않아야 할 텐데, 발은 왜 이렇게 아프지 하는 걱정. 걸으면서도 내내 자잘한 걱정을 하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까 고민한다. 생각해 보면 모두가 의식주 문제다.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자고, 어떻게 안전하고 건강하게 또 하루를 보낼 것인가 하는 걱정들. 걱정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소소한 고민과 괴로움을 떨쳐버리기를 바라면 이 길 위에 섰는데도 나는 여전히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밀밭에는 추수가 끝나 짚단만이 여기저기 쌓여 있고, 해바라기는 아직 추수를 하지 않았는지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서 있다. 밀밭의 황금빛과 해바라기의 초록빛이 어울리는 구릉진 들판의 모습이 참으로 장관이다. 작고 아담한 크기의 우리네 농촌의 그것과 다르게, 끝이 어디쯤인지 가늠하기 힘든 규모가 보는 사람을 압도해서 그런 느낌이 더 드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 길 어디쯤이 '순례자의 길' 하면 떠 올리게 되는 바로 그 사진, 끝이 보이지 않은 밀밭 사이 길 위에서  지평선을 배경으로 순례자 몇몇이 걸어가는 시그니처 사진의 배경이 아닐까 싶다. 


인생은 걷는 것

마을을 빠져나와 6km 동안 낮은 밀밭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걷는다. 뜨거운 한낮의 날것 그대로의 햇볕을 피할 곳이 없다. 저 앞쪽에는 먼저 간 이들이 보이고, 뒤쪽으로는 같은 길을 묵묵히 걸어오는 이들이 있다. 길을 걷는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각자 자기만의 이유가 있을 테다. 나처럼 버킷리스트를 실행하기 위해서 온 사람, 딸이나 아들과 함께 추억을 만들기 위해 온 사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새로운 다짐을 위해 온 사람, 종교적인 믿음을 스스로 시험해 보기 위한 사람, 그저 걷는 것이 좋아서 온 사람. 이유야 아무렴 어떤가. 삶도 제각각이듯 이 길 위에 선 이유도 제각각이어야 어울린다.


인생을 걷는 것에 자주 비유한다. 인생은 장기 레이스이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자기 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고 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듯, 기쁘고 즐거운 일도, 괴롭고 힘든 일도 있는 법이다. 인생의 어느 한순간, 길을 잘못 들어간 길을 되돌아오거나 한참을 둘러와야 하는 일도 생긴다. 걷는 것이 그렇듯 우리 삶도 그렇다. 먼저 간 이도 도착한 곳이 거기요, 나중 간 이도 마침내 그곳에 도착한다. 누가 먼저 가고 늦게 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곳까지 가는 과정 하나하나,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길 위에 선 이유와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날이 밝지 않은 이른 새벽, 나보다 먼저 간 이들이 밝히는 희미한 불빛과 걸음 덕분에 길을 헤매지 않고 걸을 수 있음에 나는 늘 감사한다. 


팜플로나에서 13.2km 지점, 산 정상(770m)까지 올라왔다. 밀밭에서 아득히 멀리 보이던 하얀 날개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풍력발전기가 설치되어 있는 그 언덕이다. 순례하는 사람과 당나귀 모형의 철제 조형물이 있고, 기념탑도 세워져 있다. 나라바 조각가 빈센테 갈베테(Vincente Galbete)가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을 주제로 만들 설치 작품이다. 이곳이 페르돈 고개(Alto del perdon)이다. 페르돈(Perdon)은 ‘용서’라는 말이다. 용서를 비는 곳인가, 아니면 지은 죄를 모두 용서하는 곳인가. 

언덕 중간에 서면, 오른쪽으로는 방금 걸어서 넘어온 팜플로나 들판이 있고, 왼쪽으로는 우테르가로 내려가는 평원이 길게 펼쳐져 있다. 여기서부터 1.5km 구간이 가파른 내리막이다. 내리막 경사가 심한 데다가 자갈이 많아 미끄럽다. 앞서 다녀간 사람들이 내리막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내리막길을 지나 17km 지점, 오테르가(Ortega) 마을에 도착한다. 마을이 참 깨끗하고 이쁘다. 어느 집 담장 위에는 버려진 순례자의 신발에 작은 선인장과 다육식물이 예쁘게 자라고 있다. 여기저기 구멍 나고 헤어진 순례자의 신발에서 새로운 생명이 깃들 것이라고 이 집주인은 말하고 있음 이리라. 


19.3km 지점, 낮고 조용한 마을, 무루자발(Muruzabal)이다. 성모 마리아 성당이 유명한 곳이라 해서 찾아갔는데 문이 닫혔다. 기온은 24도. 늘 그렇듯 목적지에 도착하기 30분 전의 길이 지루하다. 마음은 벌써 그곳 알베르게의 침대 위에 누웠으나 몸은 여전히 여기 있기 때문이리라. 그나저나 오늘은 숙소 예약을 잘못해서 에피소드가 하나 생겼다. 


숙소 예약을 며칠 전에 미리 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걸으면서 틈틈이 알아보고 다음 숙소를 예약한다. 코로나가 아직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시점이라 순례객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알베르게에 여유가 있다. 오늘은 욕조가 있는 숙소에서 반신욕도 하고 피로를 풀려고 좋은 숙소를 잡는다는 게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16km나 떨어진 라라가(Larraga) 지역에 있는 숙소를 예약했다. 전화를 했더니 취소하면 환불은 안 된단다. 택시가 없는 동네라 차를 보내준다고 해서 타고 갔더니 요금이 30유로, 아침에 나오는데 다시 30유로, 1인으로 예약했는데 2인이 왔다고 15유로를 더 내야 한다고 하는 걸 10유로로 깎았다. 욕조도 없는 방이었다. 살다 보면 이런 멍청한 짓을 말짱한 정신으로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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