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순례를 마치고(2022. 7. 25 ~ 8. 14, 493km,
#1차 순례를 마치고(2022. 7. 25 ~ 8. 14, 493km, Saint-Jean-Pied-de-Port ~ Léon)
#Léon ~Madrid
일요일 아침이다.
오늘은 마드리드로 가야 한다. 거기서 하루 쉬고 내일 오후 비행기로 귀국한다. 숙소가 레온 대성당 근처 번화가라 그런지 밤새 시끄러웠다. 창문을 닫아 놓으면 더워서 잠을 자기 어려우니 창문도, 방문도 열어놓고 잔다. 그래야 새벽에 찬 바람이 들어오면서 새벽잠이라도 푹 잘 수 있다.
어제 결혼식 뒤풀이가 많아서인지, 주말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이곳 사람들이 그런 건지 밤새 시끄럽게 떠들고 논다. 아침에 나와보니 술 취한 사람들이 더러 보인다. 새벽시간에도 여전히 여흥이 가시지 않았는지 손에 맥주병을 들고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도 부른다. 하긴 낮에는 더워서 움직이기 힘드니 시원한 야밤부터 새벽까지 놀기는 좋겠다. 나도 한때는 그랬다.
짐을 챙겨서 레온 대성당으로 갔다. 어제는 사람이 너무 많아 사진 찍기도 힘들어서 아침에 다시 가기로 했다.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도 있어서 서로 사진을 찍어줬다. 성당 앞에 ‘LEON’이라는 큰 알파벳 조형물이 있어서 대성당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딱이다. 밝아오는 하늘과 사그리아 파밀리아를 닮은 레온 대성당의 첨탑, 인적 없는 광장이 왠지 성스럽다.
마드리드행 기차(renfe AVE)는 8:40 출발인데 좀 일찍 가서 기다렸다. 티켓 출력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그리고 무엇보다 미리 가서 기다려야 안심이 되니까. 외국 여행을 할 때는 시간 여유를 두고 다니는 게 좋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대처도 잘 안되니 미리 가서 확인해야 안심이다.
스페인은 철도 교통망이 잘 되어 있다. 티켓 예매는 venta.renfe.com에 접속해서 원하는 구간, 날짜, 좌석 등급 등을 선택해서 구매하면 된다. 좌석 등급에 따라서도 가격 차이가 나고, 같은 날이라도 출발 시각에 따라서도 다르다. 기차 종류도 달라서 같은 구간이라도 소요시간도 다르니 잘 살펴봐야 한다. 회원 가입을 하지 않고 신용카드만 있으면 구입할 수 있다.
어제저녁에는 방 작가(필명 '방멘', 여행 에세이를 주로 씀)와 중국 갑부(방 작가가 정군을 그렇게 부름)처럼 보이는 정군이랑 일식집에서 저녁을 같이 했다. 스페인식 순대 요리를 먹으러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자리도 없고 시끄러워서 옮겼다. 요식업을 해 본 정군이 맛집 검색을 해서 찾아 놓은 가게들이다.
스페인 북부 어느 도시의 길가 레스토랑에서 우리나라 일식집에서 본 것과 같은 초밥과 볶음우동, 군만두를 먹는 게 신기했다. 포도주도 한 병 곁들였다. 20대와 30대 그리고 50대가 모여 앉아서 친구가 되었다. 같은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 서로를 연결해주고, 힘든 경험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유대감을 가지게 하는 모양이다. '저 나이에 나는 이곳에 올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후회와 부러움이 살짝 스쳤다. 바람이 많이 분다. 다양한 나라의 언어가 독한 담배 냄새와 섞여 바람을 타고 골목을 휘저어 다닌다. 싫지 않다. 그런 분위기 한자리에 내가 있다는 현실이 오히려 마음을 들뜨게 한다. 낯선 곳에서의 설렘이다.
방 작가는 레온에서 이틀 쉬고 다시 순례를 이어가고, 정군은 시간이 많지 않아 100km 정도는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나머지 순례를 마칠 거란다. 일정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건강하게 마무리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건배!
지나가던 스페인 노부부, 바르셀로나에서 왔다고 하는 그분들과도 기념사진을 찍었다. 몇 번 같은 숙소를 이용했고, 어제는 옆 침대에서 코 고는 소리도 튼 사이다. 남자분 여동생도 같이 순례를 했는데, 몸이 안 좋아서 중간에 미리 돌아갔다고 한다. 며칠 전에는 좀 다퉜는지 따로 다니더니 사이가 좋아졌다고 걱정 말라면 키스를 해댄다. 참 보기 좋게 늙어가는 부부다.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지만 사그리다 파밀리아 대성당 근처에 산다고 해서 가게 되면 열심히 찾을 거라고 했더니 크게 웃는다.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에 보수 공사가 완료될 예정이라, 그 해에 한 번 더 가볼 계획이다. 바르셀로나 길을 걷다 마주치게 되는 어마어마한 우연이 생길까? 사람 일이란 모르지 않나.
몸이 아주 뚱뚱해서 걷는 게 힘들게 보이는데도 꾸준히 걸어 숙소 근처에서 항상 보이던 밝은 얼굴의 독일에서 온 ‘거북이’, 뮌헨에서 스위스와 프랑스를 거쳐 2000km 걸어 순례길에 온 하르트와 마리아 부부, 늘 가까이 붙어서 비비고 쪽쪽거리던 젊은 연인 ‘쪽쪽이’, 짧은 머리카락에 체격 좋은 프랑스인 ‘군바리’, ‘수다쟁이’, ‘미스터 대만 커플’, ‘마르타’, ‘기럭지’ 모두 다 무사히 완주하기를 기도한다. 이탈리아에서 온 말라깽이 ‘프란체스카’는 어디까지 갔을까? (정군이 후에 보내 준 사진에 의하면, '거북이'는 여전히 잘 걷고 있고, 대만 커플은 헤어져 정군이랑 3일째 같이 걷고 있다고 한다.)
순례는 나 혼자 걷는 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함께 걷는 길이다. 이름도 성도 국적도 모르고, 왜 이 길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르지만, 함께 한다는 것, 무사히 하루하루를 걸을 수 있기를 서로 바란다는 마음은 모두가 같다. 서로에 대한 염려와 응원이 길 위에 서 있은 모든 사람들에게 서로 전해 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마드리드로 달려가는 기차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낯익다. 내가 걸어온 길도 저 어디쯤에는 있을까?
내년에 이곳을 다시 찾아, 2차 순례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렌다.
그때 그 길 위에서 다시 누구를 만나게 될까? 누구와 같이 길을 걷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