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길을 오래오래 걷는다
4길 예미역~꽃꺼끼재(화절령) / 사북역 : 28.76km, 9시간 20분 고도 403~1197m (Gamin 측정 거리 31.93km)
- [아침 이동] 호텔(7:00)-<도보 10분>-사북역-<07:24, 35분>
- [4길 트레킹] 예미역(8:00)-정선군 신동야구장-함백 초등학교-엽기소나무길 초입-타임캡슐공원 –새비재-사동골-꽃꺼끼재(17:20)
- [원점 회귀] <택시, 12분>-그랜드인투라온 호텔(4박)
- 볼거리 : 타임캡슐공원, 꽃꺼끼재(화절령)
- 아리아리콜 033-592-7979
다행히 비가 그쳤다.
오늘은 운탄고도 9개 길 중에서 가장 긴 코스, 예미역에서 화절령까지 28.76km 다(실제로 걸어보니 30.81km이고, 택시 타는 곳까지 1km 더 내려와야 한다). 예미역에서 정방향으로 걷기 위해 숙소(그랜드인투라호텔 정선)에서 기차를 타고 예미역으로 간다.
이른 아침에 사북역에 사람이 북적인다. 거의 대부분 연세가 많이 드신 분들인데 어디를 가시는 걸까? 이곳 사북은 옛 탄광의 부흥기의 영화는 잃었지만 카지노의 행운을 살리려는 듯, 호텔, 모텔 등 숙박업소, 마사지서비스, 현물을 잡히고 돈을 빌리는 전당사(전당포), 음식점이 즐비하다. 카지노가 있는 강원랜드, 골프와 스키, 워터파크가 있는 하이원리조트는 여기서 차로 7분 거리다.
열차를 기다리며 같은 벤치에 앉은 80대 정도로 보이는 노인께 여쭤 봤다.
“다들 어디로 가시는 거죠? 사북에 사시는 분들인가요?”
”서울도 가고 제천도 가지. 사북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다들 잠 안 자고 밤새 카지노 하고 오는 사람들이구먼. “
“예?” 내 작은 눈이 아마 두 배는 커졌을 테다.
“봉사(시각장애인)도 하고 앉은뱅이도 카지노는 하지. 저 할멈은 여기 20년째 다녀. 중독이지 중독, 일당을 50만 원을 줘도 힘들어서 못 할 일을 하고 있으니… 나도 작년에 바람이 들어서 다니는구먼 “
그러고 보니 그 어른도 지팡이를 짚고 있다. 동네 노인정으로 마실 다실 듯 보이는 분들이 죄다 밤새 카지노에서 놀다(?)가 서울도 가기 위해 첫 기차를 탄다는 거다. 기차에 타서 보니 금방 머리를 대고 주무시는 분, 빈 옆자리에 머리를 뉘고 눕는 분, 밤새 못 드셨는지 김밥을 꺼내 드시는 분, 밤새 얼마나 몸과 마음이 힘들었을까 싶다. 그래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침이 밝아 오는 게 못내 아쉬웠을 듯. 여기가 바로 말로만 듣던 카지노 동네로구나 (저녁 식사하는 식당에서 들은 얘기인데, 월 15회 이내로 카지로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서 내일, 그러니까 새 달이 시작되는 날 사람이 엄청 온다고 한다 ).
7:56분 청량리행 무궁화로를 타고 예미역에 내렸다. 역 건너편 MTB호텔에서 이틀을 묵어서 그런지 낯설지가 않다. 출발 사진을 찍으려는데 ‘아뿔싸, 핸드폰이 없다’. 기차에 두고 내렸다. 예미역 사무실에 가서 직원에게 핸드폰을 두고 내렸다고 하니 무전으로 열차에 연락을 해서 다음 기차 올 때 받아 주신다고 한다. 그러면 2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오늘 트레킹 도착지인 사북역에 맡겨주면 마치고 찾아가겠다고 그쪽으로 보내달랬더니 그렇게 해 주신다고 한다. 다행이다.
예미역을 나와서 왼편 돌면 4길의 시작이다. 도로가의 인도를 따라 걷는다. 길이 좋지 않다. 인도인데도 산 쪽에서 물이 흘러 내려오고, 보도블록에는 이끼가 끼어서 미끄럽다. 차도 쪽에도 물이 많아 지나가는 차들이 물을 확 튕긴다. 조심조심 걸어 올라가니 ‘정선군 신동야구장’ 보이고 바로 옆에는 ‘기초과학연구원 정선 예미랩’ 건물도 있다. 두 건물 모두 작은 시골 마을에 있기는 좀 의아하다.
기찻길 옆으로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예쁜 조동 3리를 지나는데 노란색 강원 에듀버스가 선다. 등교하는 아이를 태우는 모양이다. ‘아이들 등교 시간이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마음이 소란스러워진다. ‘이 시간이면 교장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시간인데, 2학기를 시작했구나.’ 조금 올라가니 함백초등학교, 그 뒤로 함백중고등학교가 있다. 화장실이 급해서 학교 지킴이 분께 얘기했더니 인적사항을 적고 들어가라고 한다. 학생들의 안전을 지키는 일에 충실하신 분이다. 감사하다. 화장실 급하다고 웬만해서는 학교로 안 들어온다는데, 나는 학교가 아직도 편한 모양이다.
학교를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간다. 왼쪽 아래 철길 옆으로 다닥다닥 이쁜 지붕이 붙은 마을이 보인다. 무슨 사연인지 마을 어느 집 문 앞에 아주머니 한 분이 앉아 채소를 다듬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상대는 보이지 않는데, 저 소리는 아마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듣지 싶다. 아주머니의 낯선 욕지거리를 들으며 ‘엽기적인 그녀 소나무길’ 초입에 들어선다. 여기서부터 거의 8km가 시멘트 포장 오르막 길이다. 그래도 경사가 급하지 않고 길 좌우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울창하게 서서 햇볕을 가려준다. 점차 고도가 높아지면서 저 멀리 산들이 아래로 아래로 뒤쳐져간다.
산들의 풍경을 즐기며 걷는데, 나무들이 모두 베어져 나간 벌거숭이 산등성이에서 오래된 파란색 트럭이 서 있다. 누군가 커다란 트럭 바퀴를 빼어 놓고 한참 수리에 열중인데, 가까이 가서 보니 차도 사람도 나이가 많다. 차량의 연식이 얼마나 되었는지 물어보니 67년 산이라고 한다. 나보다 한 살이 많다. 이렇게 오래된 차는 부품이 없을 텐데 어떻게 직접 수리를 하시냐 했더니, 이것저것 가져다가 맞춰서 수리해서 쓴 지 40년이나 되었단다. TV에도 나온 차라며 자부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 트럭은 미국 제너럴모터스(GMC)가 1940년대 이후 생산한 모델인데, GMC를 일본식 발음인 '제무시'로 불린 차종으로 힘이 좋기로 유명하단다. 벌채 작업장인 가파른 비포장 도로에서 나무를 싣는 용도로 운행되곤 했다는데 지금도 여전히 현역이다. 자식 같은 차에 대한 애정이 오래된 트럭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고 있다. 멋지다.
저 멀리 ‘엽기적인 그녀 소나무’가 있는 타임캡슐공원이 보인다. 타임캡슐공원은 정선군 질운산(1173m) 중턱 850m 높이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은 온통 고랭지채소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곳은 2001년 개봉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촬영지다. 주연을 맡은 차태현(견우)과 전지현(엽기녀)이 이 엽기소나무 아래에서 목걸이와 편지를 담은 타임캡슐을 묻고 3년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그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여기서는 지금도 타임캡슐을 대여하거나 구입해서 보관할 수 있다. 이용기간(100일~3년)에 따라 가격 차이가 난다(10,000~40,000원). 제때에 개봉되지 않는 타임캡슐이 얼마나 많을까 싶지만 그것도 나름이 추억이 아니겠나. 아띠엔 솔 카페에서 시원한 차 한 잔을 마시고 다시 출발.
배추와 양배추, 무밭, 사과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새비재로 향한다. 새비재(鳥飛峙)는 매봉산(1,268m) 맞은편에 있는 질운산의 왼쪽 날개 부분에 해당하는 750m의 고개이다. 새비재라는 지명은 산의 형상이 새가 날아가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유래하였으며, ‘조비치’, ‘조비재’라고도 한다. 새비재에는 예부터 “앞 산인 매봉산은 매이고 조비치산은 새이기 때문에 조비치 마을 남자가 매봉산 마을 여자와 결혼을 하면 남편이 일찍 죽어서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새비재는 의병, 6·25 전쟁과 같은 슬픈 역사와 민초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고개이다. 1949년 좌익 빨치산에 의하여 동네의 우익 청년 단원 10여 명이 학살당하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광부의 흔적을 찾아 떠난 길 위의 마을과 고개, 산과 물곳곳에 사연이 서렸다. 사연은 사람의 삶의 흔적이고 관계이며 역사다.
새비재에서 사동골로 내려오는 길은 임도다. 새비재를 기준으로 지나온 쪽은 사유지이고 이쪽은 산림청이 관리하는 곳이라 그런지 새비재 이쪽은 곳곳에 나무 벤치가 있어 자주 쉬어가게 한다. 길을 걷는 사람을 배려한 누군가에게 또 감사하다. 포장이 되지 않은 길은 차 두 대가 지나갈 정도로 넓다. 고도가 1,000m 내외인 이 높은 곳에 이렇게 긴 임도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오른쪽으로는 이름 모를 산들의 준봉과 깊은 계곡이, 왼쪽으로는 간간이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숲이어서 걷기에 참 좋은 길이다.
하지만 참 길다. 새비재에서 사동골까지 6.9km, 사동골에서 꽃꺼끼재(화절령)까지 또 9.14km나 된다. 길고 길다. 오랜만에 참 긴 길을 참 오래 걸었다.
*꽃꺼끼재까지 왔다고 끝이 아니다. 여기서 다시 콜택시가 오는 포장도로까지 1.2km를 더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도로포장만 되면 택시가 꽃꺼끼재까지 올라올 수 있다.
*운탄고도 5길은 꽃꺼끼재에서 출발인데, 아침에 여기까지 오려면 택시를 타고 와서 출발지점까지 가파른 오르막을 30분 정도 올라야 한다.
철이의 하루여행, <운탄고도 1330을 걷다>는 10화까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