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은행나무, 2011)』을 읽었을 때, 영화로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단어와 문장들이 영화의 장면으로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2018년에 영화로 나왔다. 대한민국 대표 미남 배우 장동건이 새로운 캐릭터 연기를 시도한 영화라고 관심을 모았지만, 흥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는 소식이다. 영화가 소설과 좀 다른 부분이 있기는 한데, 영화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최현수(류승룡)는 인적이 드문 세령 마을의 댐 관리팀장으로 부임을 앞두고 있다. 대출을 끼고 어렵게 마련한 아파트는 전세를 주고, 당분간 댐 관리를 하며 그곳 사택에서 지낼 생각이다. 가족이 지낼 사택을 보러 가는 날, 안개가 짙게 깔린 세령 마을 입구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중 갑자기 뛰어나온 여자 아이를 쳐 교통사고를 낸다. 음주 운전에 사고까지 냈으니, 너무 놀란 그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아이를 호수에 유기한다.
아이의 실종으로 마을은 발칵 뒤집힌다. 곧 대대적인 수색 작업이 이루어지고 아이는 결국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마을 대지주이자 아이의 아버지 오영제(장동건)는 딸의 죽음에 광기 어린 분노를 드러낸다. 그는 아이의 죽음이 사고 때문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직접 범인을 찾기 위해 증거를 모으기 시작한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 7년 전 그날 밤,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다.
오영제가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극의 긴장감을 높이지만, 독자나 영화 관람자 입장에서는 범인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라 그것이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은 아니다. 오히려 최현수와 오영제, 두 주인공 간의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좁혀졌다 멀어졌다 하는 장면에서 마음을 졸이게 된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그들의 행동을 이끌어 내는 두려움과 공포, 사랑과 복수 등 감정의 변화에 주목하게 된다. 최현수는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오영제는 왜 7년의 세월을 복수에 집착했을까? 아이가 길가로 갑자기 튀어나와 피할 수 없는 사고이기는 했지만, 빨리 구조를 했으면 아이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최현수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아이를 세령호에 던져버린다.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는 정도를 생각해 보면, 그런 행동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오영제의 행동은 또 어떤가? 자신의 아내와 아이에게 가학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딸아이의 복수에 그렇게 집착할 수 있을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복수에 집착했던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소유물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복수이지 않을까? 아내와 딸을 한낱 소유물로만 보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소유자다.
오영제의 외모나 삶이 최현수보다 평범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이 보인 '인간의 악'은 모두 평범함을 넘어선다. 어린 여자아이의 목숨을 쉽게 던져버리는 마음과 아들에게 보이는 사랑과 애정은 같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인가? 매질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는 딸의 죽음에 그토록 분노하는 오영제의 이중성은 도대체 어디에 도사리고 있었던 걸까?
우리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얼굴이 험상궂게 생겼거나, 어릴 때부터 나쁜 짓을 일삼아 왔거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고립된 생활을 하는 사람일 거라 상상한다. 내 주변에 있는 보통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고, 원초적으로 악한 모습을 가졌다고 짐작하는 것이다. 나쁜 사람은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매일같이 뉴스에서 보도되는 사건 사고들, 그중에서도 세상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고,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가만 보면 우리 이웃이다. 그런 이들의 주변인을 인터뷰한 내용에 한결같이 나오는 말이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다'이다. 믿고 싶지 않지만 악은 특별한 무언가에서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곳에서 나온다. 그런 악의 평범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이가 있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아렌트의 1963년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는 의미다.
1960년에 이스라엘의 첩보기관 모사드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국제법을 어기면서까지 아르헨티나에서 체포한다. 예루살렘으로 압송된 아이히만은 기소되어, 1961년 4월 11일,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공개재판을 받았다.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을 지켜보고 그것에 대한 보고서를 <뉴요커>에 게재하는데, 이것이 나중에 오늘날 명저로 평가받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1963년>의 기초 자료이자 그의 철학의 중심사상이다.
이 책이 충격적인 이유는 수많은 학살을 자행한 아이히만이 아주 사악하고 악마적인 인물일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매우 평범했다고 설명한 점이다. 아이히만은 개인적으로는 매우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엄청난 학살을 자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해서 결론을 내린 것은 바로 악의 평범성이다. 쉽게 말해서 악의 평범성이란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악은 특별히 악마적인 어떤 것에서 기원하는 게 아니라는 아렌트의 주장은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이 책이 출간된 후 수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악은 선함과 반대되는 특별히 악한 근원으로부터 생긴다는 이전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아이히만과 같은 거대한 악을 그저 평범한 어떤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악을 강력하게 단죄하려는 유대인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악이 평범하다는 것은 우리들 중에 누구라도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불안을 조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렌트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기계적으로 행하는 일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그것 자체가 바로 악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여러분이 텔레비전의 어느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가정해 보라. 그 프로그램은 학교 상황극인데, 역할은 학생과 교사로 나뉜다. 일부는 학생 역할을 하고, 일부는 교사 역할을 하게 된다. 학생이 교사가 낸 문제에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틀린 답을 말하면 벌을 주게 된다. 벌은 전기의자에 앉혀서 전기자극을 주는 것이다. 전기 자극은 15 볼트에서 시작하여 450 볼트까지 올릴 수 있다. 여러분이 교사 역할을 맡았다고 가정할 때, 감독의 지시가 있을 경우 전기자극을 어느 선까지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쓰는 전기가 220 볼트이고, 300 볼트이면 인체에 치명적이다.
실제로 이런 실험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 밀그램 실험(Milgram Experiment)이라고 하는데, 1961년 예일 대학교의 심리학과 조교수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이 실시한,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이다. 밀그램은 "징벌에 의한 학습 효과"를 측정하는 실험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집하고 피실험자들을 선생과 학생으로 나누었다. 실험에 참가하는 대가는 4달러였다. 그리고 선생 역할과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를 각각 1명씩 그룹을 지어 실험을 실시했다.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를 의자에 묶고 양쪽에 전기 충격 장치를 연결했다. 그리고 선생이 학생에게 문제를 내고 학생이 틀리면 선생이 학생에게 전기 충격을 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사실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는 배우였으며, 전기 충격 장치도 가짜였다.
실험의 결과는 놀라웠다. 65%의 피실험자가 450 볼트까지 전압을 올렸다. 기계에는 300 볼트 이상은 위험하다는 표시가 되어 있었고, 학생 역할의 배우는 전기 충격을 받으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150 볼트가 넘어가면 가슴이 아프다며 그만둘 것을 간청하고, 전압이 너무 높아지면 죽은 듯이 전기 충격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연기까지 했다. 이들은 자신이 죽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단지 지시에 따라 계속 전기 충격을 가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해하거나 실험 목적이 무엇인지 의심하기는 했으나 밀그램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거나 말로 다그치자 시키는 대로 계속했다. 나머지 35%의 피실험자 중에서도 실험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거나, 위험에 처한 학생을 구하려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실험 결과는 그렇다고 말한다.
본래 이 실험의 의도는, 인간의 도덕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아무리 명령이 있는 상황이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심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실험 설계자가 책임을 진다고 강압적으로 지시하더라도, 자신의 도덕적 양심과 판단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 설득력 있는 상황이 생기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윤리적, 도덕적인 규칙을 무시하고 명령에 따라 잔혹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결과를 보여준 것이다.
이 실험은 실험에 참가한 사람이 후에 트라우마를 겪는 등 실험 윤리가 문제가 되고, 실험자가 대학에서 해고되는 등 후폭풍이 컸다. 또한 인간이 어떤 상황에 놓일 경우 얼마나 나약한 존재가 되는지,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고민을 우리에게 던졌다.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면, 나 역시 그럴 수 있을까? 실험이라고 했으니, 설마 사람이 진짜로 죽기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하면서 괴롭힘을 즐기지는 않았을까? 그 역을 생각하면 더 오싹하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꼴리니꼬프는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죽이고 돈을 훔치기로 결심한다. 결국 라스꼴리니꼬프는 전당포 노인을 도끼로 죽이고, 그 현장에 갑자기 나타난 노파의 배다른 여동생 리자베따도 죽인다. 그런데 이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른 살인범 라스꼴리니꼬프는 원래 악한 인간이 아니다. 그 이전에는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하는 못된 짓을 한 적이 없는 착한 대학생이다. 폐결핵에 걸린 친구를 도우려고 자기 생활비를 다 써버려 힘들어하고, 게다가 그 친구 아버지 장례도 치러준다. 심지어 살인을 한 후에도 술집에서 만난 퇴역 관리 마르멜라도프가 마차에 치어 죽자, 어머니가 빚을 보내 준 학자금을 그의 아내에게 장례비용으로 쓰라고 주기도 한다.(『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웅진 지식하우스, 2017)』에서 인용)
라스꼴리니꼬프는 살인을 한 후에도 선행을 한 것은 원래는 악인이 아니어서일까? ‘7년의 밤’의 오영제는 원래부터 악인으로 태어난 것일까? 아내와 딸을 학대하고, 최현수가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그의 아들을 7년 동안 따라다니며 괴롭히며 무엇을 바란 것일까?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최현수는 어떻게 어린아이를 물속에 던져 버린 걸까? 밀그램 실험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괜찮다는 말을 곧이듣고 전압을 계속 올린 그들과 나는 다른가? 예루살렘의 재판정에 서서, 태연히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는 아이히만의 그 ‘무지한 악’은 어디서 온 것일까?
악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언제, 어떻게 선과 악이 나의 존재를 뚫고 나의 또 다른 실존으로 떡하니 자리 잡을지 모를 일이다. 일이 벌어지고 난 후, 후회는 늦다. 그러니 선과 악이 내 안에서 함께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그것을 인정할 때 내 안의 선과 악의 다툼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실존을 나 스스로 판단하고 바로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