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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Jun 15. 2018

파리(Paris)_다시, 파리에 가자

파리(Paris)에 대한 로망

<라 붐(1980)>, <그랑블루(1988)>, <니키타(1990)>, <퐁네프의 연인들(1991)>, <레옹(1994)> 이 영화들은 프랑스 영화다. 1980년에 개봉된 영화 <라 붐>은 15살이었던 소피 마르소가 주연을 맡았는데, 인기가 대단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TV와 비디오 판권만 있어서 스크린 개봉은 2013년에야 이루어졌음에도, 주제곡인 리처드 샌더슨(Richard Sanderson)의 리얼리티(Reality)와 주인공 소피 마르소의 매력에 모두가 푹 빠졌었다. 학교 앞 문구점에는 그녀의 얼굴 책받침과 전신 브로마이드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방의 벽면을 온통 소피 마르소의 사진으로 도배해 놓은 녀석들도 종종 있었다.


프랑스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에 비해 자극적인 재미가 덜하고 이해하기도 어렵게 느껴지는데도 그녀 덕분에 영화는 한국에서 히트였다. 프랑스 영화의 매력은 배경, 음악,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뒤의 긴 여운이 아닐까 싶다. <니키타>나 <레옹>처럼 프랑스 영화 특유의 감성과 함께 강렬한 할리우드식 액션의 재미도 선사하는 영화도 종종 있기는 하다.

<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퐁네프 다리 위의 미셀과 알렉스>

또 다른 프랑스 영화  <퐁네프의 여인들(The Lovers On the Bridge)>은 파리 센 강의 아홉 번째 다리, '퐁네프 다리'가 주 무대이다. 시력을 잃어가며 그림을 그리는 여자 ‘미셀(줄리엣 비노쉬 Juliette Binoche )’과 퐁네프 다리에서 처음 만난 그녀를 삶의 전부로 생각하는 ‘알렉스( 드니 라방 Denis Lavant)’의 사랑을 그린 영화다. 이쁜 여자와 잘 생긴 남자의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라, 인생의 끄트머리에 선 위기의 남녀가 불꽃같은 사랑을 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 파리에 가서 저 다리 위에 서 보리라 생각했었다. ‘파리’는 그렇게 미셀과 알렉스의 처절한 사랑처럼 ‘프랑스혁명’ 보다는 에디뜨 피아프의 노래와 에밀 졸라의 소설로, ‘나폴레옹’ 보다는 고흐와 폴 세잔의 그림으로 먼저 다가온다. 낭만과 사랑, 문학과 예술이 숨 쉬는 도시라는 가슴 두근거리는 생각. 그 생각들이 에펠탑, 몽마르트르 언덕, 루브르 박물관, 노스테르담 성당, 센 강으로 이어지면 파리는 우리 젊은 날의 희망과 설렘의 한 장면이 된다.


에펠탑(Tour Eiffel)과 루브르 피라미드(Louvre Pyramid)

‘파리’를 상징하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라 어느 것 하나를 꼭 집어 말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에펠탑과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이다. 파리에는 두 번 갔었는데, 2007년에 갔을 때는 2001년에 보지 못했던 에펠탑의 조명쇼를 볼 수 있었다. 파리의 야경이 낮보다 더 멋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마르스 광장에서 바라본 반짝이는 에펠탑은 또 다른 매력이었다. 에펠탑이 있는 파리를 찾는 관광객이 한 해에 수백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파리를 찾는 사람들이 모두 에펠탑을 보기 위해 가는 것은 아니지만, 에펠탑에서 쏘는 전파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분명하다.


에펠탑은 1887년 시작해 1889년 완공되었다. 마르스 광장에 지어진 이 철제 탑은 파리에서 가장 높은(324m) 건축물이다..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 세계 박람회인 만국 박람회의 출입 관문으로 건축되었는데, 이름은 탑을 디자인한 프랑스 공학자이자 건축가인 귀스타브 에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지금은 파리의 랜드마크로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건축물이지만, 처음부터 사랑을 받은 건 아니었다. 탑이 처음 세워졌을 때는 많은 이들로부터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고 눈에 거슬린다는 혹평을 받았다. '철판으로 엮은 역겨운 기둥'이라는 모멸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모파상 등 유명인사들도 공개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 마르스 광장에서 바라본 에펠탑 >

파리를 상징하는 또 다른 건축물이 루브르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재도 대단한 것들이지만, 특히 관광객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이 루브르 피라미드다. 박물관 바깥에서도, 또 안에서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박물관 앞 나폴레옹 3세 뜰에 설치되어 있는 유리와 철제로 만들어진 피라미드 구조물인 이것 또한 건축 당시에는 논란이 많았다.

 

1981년 미테랑 당시 대통령은 루브르 박물관 전체 건물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한 '대 루브르 박물관 계획(Grand Rouvre)'을 발표한다. 이 계획에 응모한 수많은 건축 설계안 중에 중국계 미국 건축가인 아이오 밍 페이(Ieoh Ming Pei)의 안이 최종 채택된다. 이 설계안은 루브르 궁 뜰에 유리로 된 피라미드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중세 건물인 루브르 궁과 현대식의 유리 건축물이 과연 어울릴 수 있을까? 다소 생뚱맞은 조화에 대한 당시 많은 사람들의 우려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 중세와 현대의 만남, 루브르 박물관, 출처=유럽 자유여행 투어핀>

프랑스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3년 공사는 계획대로 착공되고,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던 출입구가 이 유리 피라미드 아래로 통일된다. 완공 후에는 평가가 완전히 달라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명 수집품들만큼이나 걸작으로 인정받게 된다. 기존의 석조 건축물과 투명 유리와 철제로 만들어진 현대적인 피라미드는 강렬한 대조 속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건축 재료의 그것뿐만 아니라 중세와 현대, 고풍스러움과 세련미, 과거와 현재를 아우러며 수 백 년의 시간을 자연스럽게 담아내고 있다.   


에펠탑과 루브르 피라미드 모두 지금은 찬사를 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반대와 비난의 중심에 있었다. 엄청난 예산과 노력이 박수는 커녕 역사의 오점으로 남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반대하는 다수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고 편안한 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것이다.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의 시처럼 사람들은 두 갈래 길에서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프랑스의 운명을 바꿔 놓았는지도 모른다. 미래를 내다보고 두 계획을 밀어 부친 사람들, 생뚱맞은 철골 구조물과 낯선 유리 건축물의 설계안을 지지한 사람들, 그리고 혼신을 다해 지금이 아니라 미래를 그려낸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어디서 그런 의지와 힘이 솟아났을까?


인상파 화가들의 고군분투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과 조롱을 견뎌낸 파리의 또 다른 모습이 있다. 인상파라 불리는 화가들이다. 1990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미술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그림이 인상파 화가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다. 무려 8250만 불, 한화로 900억 원이나 된다. 마네(Edouard Manet), 모네(Claude Monet), 드가(Edgar Degas),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값은 천정부지로 솟았다. 지금은 어마어마한 돈이 아니면 개인이 소유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지만,  150여 년 전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방대한 인상주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 곳에는 2011년부터 인상파 화가 마네, 드가 , 모네, 세잔, 르누아르, 시슬레 Sisley의 작품을 보다 일관성 있고 전문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당시 그들의 그림은 이 '아직 완성되지 못한 그림', '순간적으로 포착해 대충 그린 스케치', '캔버스 위에 물감을 대강 발라놓은 그림' 등의 평가와 조롱을 받았다. 당연히 그림값도 형편없었다.

< 가셰 박사의 초상(첫째 판), 빈센트 반 고흐 작, 1890년, 캔버스에 유화, 67 × 56 cm, 출처= 위키피디아 >

인상주의의 시작은 이러했다. 1873년에 전통 있는 파리의 미술전인 살롱(The Salon)에서 특정 화풍의 화가 그림들이 대거 낙선되는 사건이 있었다. 살롱전에서 낙선한 화가들이 이에 반발하여 다음 해인 1874년에 낙선전을 열었는데, 여기에 모네는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를 출품했다. 이 전시를 본 비평가 루이 르로이(Louis Leroy)가 신문에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The Exhibition of the Impressionists)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썼다. 루이는 그 기사에서 모네의 그림이 단순한 스케치 작업이며 완성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고 비판하며, 특히 이 전시의 작품들이 자연의 '본질'은 그리지 못하고 피상적인 '인상'만을 그렸다고 조롱했다. 여기서 '인상주의'라는 말이 유래하게 된다.


루이 르로이가 지적한 것처럼, 인상주의 또는 인상파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색채·색조·질감 자체에 관심을 두었다. 이들은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했다. 사진처럼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상 깊었던 한 순간의 장면을 화폭에 옮기고자 한 것이다. 사실적인 묘사와 완벽한 구도를 중요시했던 신고전주의의 작품들과 달리 순간적이고, 날렵하면서도 모호한 붓질이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빛과 색채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은 캔버스를 들고 밖으로 나가 풍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당시의 비평들이 모두 인상주의 화가들이 추구하는 핵심을 정확하게 설명한 것이기도 하다.


인상파 전시회를 본 한 유머 주간지의 기사를 보자.  

“르펠티에 가는 재앙의 거리가 되었다. 오페라 하우스의 화재 이래로 또 새로운 참사가 벌어졌으니 바로 뒤랑 뤼엘 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소위 회화 전시가 바로 그것이다. 내가 화랑에 들어갔을 때 내 눈은 끔찍스런 무엇에 사로잡혀 버렸다. 여자도 끼어 있는 대여섯 명의 정신 질환자가 합세해서 그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하는데, 사람들은 이 그림들 앞에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 그 그림을 보았을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이들 예술가인 양 하는 작자들은 스스로를 전위파니 ‘인상주의자’니 떠들고 있다. 캔버스 위에 물감을 대강 붓질해서 발라놓고는 거기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 놓은 것이다. 이런 짓은 베들렘의 정신병자들이 길바닥에서 주운 돌을 다이아몬드라고 우기는 것처렴 웃기는 일이다.(서양미술사, E.H. 곰브리치, 예경)” 당시의 인상주의 화가들과 그들이 그린 그림에 대한 대중들의 생각이 어떠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대중의 조롱과 비난을 꿋꿋이 견뎌 냈다. 기존의 화풍에서 벗어나 그들이 생각한 세상을 그려냈다. 그것은 단지 그림이 아니라 변화 그 자체였다. 고정된 대상에서 벗어나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움직임에 따라 붓과 마음을 움직였다.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남긴 작품은 수 백 년의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로 왔고, 또 다른 세대에게로 갈 것이다.  


다시, 파리에 가자

공고하기만 한 기존의 관념과 체제를 거부하고 새로운 것은 시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한 시도가 시간이 지나면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새로움에 대한 시도와 도전, 그리고 그것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마침내 승리하리라는 막연하고도 불확실한 '확신'을 갖는 것은 긴 고통의 시간을 인내해야만 하는 일이다. 에펠탑, 루브르 피라미드, 인상파 화가들... 파리를 상징하는 무모한 모험, 대다수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견뎌낸 도전, 그 속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숱한 사람들의 용기와 고통, 인내의 시간들이 숨 쉬고 있다.

< jtbc 드라마 '더 패키지'의 한 장면, 출처=jtbc>

상들리제 거리의 화려한 불빛, 개선문의 웅장함, 파리지앵의 일상과 삶을 동경하고 사랑했던 젊은 날의 설렘을 빛바랜 그것으로 제쳐둘 필요까지는 없겠다. 그 시절이 우리 중년들의 가슴 어디엔가 새겨져 있음은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터이다. 지금 우리는, 그 화려함 뒤에 숨 쉬고 있는 또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볼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다시 파리에 가자. 인상파 화가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세계를 화폭에 담아내듯, 우리도 시대와 세상의 변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가슴에 담아오자. 변화는 변화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랑과 진실은 언제나 그 자리에 남는다. 무엇을 남기느냐는 결국 시간이 말해주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파리는 우리에게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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