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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Jun 26. 2018

생각하는 중년 _ 생각 좀 하자

생각 없는 사람, 생각 많은 사람

"뭔 사람이 그리 생각이 없어?"

"도대체 생각은 하고 사는 거야?"

"생각이 있는 사람이야, 없는 사람이야?"

"생각 좀 하고 삽시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거나 일을 잘못 처리한 사람에게 흔히 하는 말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채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생기지 않았냐고 책망하는 것이다. 나무라는 입장에서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겠지만, 그런 소리를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억울해 하기도 하겠다. 대개는 자기보다 어른이거나 윗사람 보다는 아랫사람이나 어린 사람을 대상으로 하게 된다. 대개의 경우에는 비난이나 힐난이 담겨 있지만, 말하는 사람의 어투나 상황에 따라서는 안타까운 위로의 말이 되기도 한다. ‘조금 더 생각을 하고 조심해서 하지 어떡하나’ 하는 염려가 담겨 있을 때가 그렇다. 그렇더라도 '생각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다. 사람에게 생각이 없다는 것은 심하게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너만 생각 있는 사람이야? 혼자만 잘났어 정말"

"누구는 생각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참고 사는 거지"

"뭘 그렇게 생각이 많아, 하라고 하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이런 말들은 생각이 없어서 비난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많다고 타박을 주는 경우다.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살면 될 텐데 꼭 반대의견을 내거나 다른 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누구는 좋아서, 아무 생각 없어서 이러고 사는 게 아니라 서로 피곤해지는 게 싫어 그냥 참는다는 거다. 물이 흘러가는 것 처럼 자연스럽게 묻혀서 살면 좋을 것을 그러지 못한다고 퉁을 준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듯 우리 사회는 독불장군 스타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저 평범하게 군소리 없이 살면 서로가 편하다는 생각이 깊게 베여있다.  


그래서 그럴까,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어지기도 한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봤으면 좋겠다 싶다. 괴로움이나 걱정거리가 되는 그 무엇을 머리 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리고 머릿 속을 비우고 싶어질 때가 종종 있지 않나. 그렇다고 생각 없이. 생각을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우리가 살아있는 매 순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Cogito ergo sum(고기토 에르고 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한 말이다. 종교가 모든 권위를 틀어쥐고 있는 시절에 불확실한 모든 것을 배척하고 의심하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인간의 존재를 증명해 보인다는 의미다. 인간이기에 생각하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생각 없음’이 그래서 큰 비난이 된다.  

그럼 도대체 생각을 하면서 살라는 건가, 아니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게 좋다는 건가? 생각하는데도 어느 정도의 적정한 기준이라는 게 있는 건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보는 것이 필요하기는 한 건가, 아니면 그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가끔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되고, 어떤 때는 생각이 너무 지나친 경우가 되니 적정한 수준을 찾아야 하는 건가? 어떤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니 생각의 깊이나 정도를 적절하게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주변 상황에 따라서, 일의 사정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으니 종 잡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이 '생각'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 내게로 온 걸까?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인간의 생각, 사고, 인지능력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인간의 사고 과정은 개인적이면서 사회문화적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생각은 사회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언어와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공동 관심과 협력 커뮤니케이션으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아기들이 이미 인간 특유의 인지 능력을 가진다는 사실은 인간 특유의 생각은 문화와 언어가 아니라 원초적인 사회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 인간의 진화와 뇌의 발달 출처=네이버 포스트 더굿북>

생각의 사회성과 집단 지향성을 주장하는 미국의 영장류 학자이자 독일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공동소장인 마이클 토마셀로(Michael Tomacello, 1950~)는 생각을 이루는 요소를 다음의 세 가지로 들었다. 첫째,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오프라인'으로 전달하는 인지적 표상. 둘째, 표상을 시뮬레이션하거나 인과, 지향성, 논리를 추론하는 능력. 셋째, 자신을 관찰하거나 시뮬레이션의 결과를 평가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능력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영장류를 비롯한 일부 동물들도 생각을 하지만 인간의 생각은 그것과는 다르다. 인간의 생각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집단생활을 하고 소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인원 조상들이 사회성을 가지고 생각이라는 것을 했지만 이는 대체로 개인적 생존을 위한 것이었고, 또한 경쟁적이었다. 그들은 작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면서 개별적이고 경쟁적으로 먹이를 구하며 살았다. 예컨대 침팬지는 무리 지어 사냥감을 쫓는다. 하지만 사냥한 먹이를 나누기보다는 자신이 독차지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협력 관계’로 볼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행동하거나, 기껏해야 싸움에서 유리한 편에 서려고 일시적으로 협력할 뿐이다. 집단 구성원을 경쟁자로 보고 경쟁에서 이기려 한다. 대형 유인원의 인지능력은 온전히 경쟁을 위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인간의 생각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협력을 통해 서로의 생존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경험을 다른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했다. 어디서 먹이를 구할 수 있는지, 어떤 열매가 먹을 수 있고 없는 것인지, 어디서 물을 구할 수 있는 것인지 서로에서 자신의 지식과 축척된 경험을 전달했다. 이렇게 전달받은 경험을 스스로 시뮬레이션을 하고, 사건의 원인과 결과, 그것으로 인해 향후에 얻을 수 있는 이점과 손해를 미리 생각하는 능력은 인간 고유의 것이다. 또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되돌아 보고, 행동을 시행하기 전에 그 행동의 결과를 평가하여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도 다른 영장류와 다른 인간만의 특성이다.

유인원과 다름 없었던 시절, 인간의 생각도 개인적인 수준의 목적 달성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40만 년 전쯤, 초기 인류 시대에 인간은 유인원과 다른 생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초기 인류에게는 언어 사용이나 문화생활은 없었지만, 더 큰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의 협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했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사람끼리 그 결과에 대해 제대로 평가할 수 있어야 했다. 협력을 통해 사냥이 성공할 수 있을지, 성공 후에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질지, 또 타인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를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추론과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면 사냥에 실패하는 일이 자주 일어날 것이고 자신과 가족이 음식을 구하지 못해 굶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 시대에는 협력의 규모가 무리에서 집단으로 확대되었다. 개인대 개인의 협력과 경쟁이라는 무리 범위에서 집단대 집단의 생존 문제의  범위로 확장된 것이다. 이 시기에 언어가 등장하면서 객관적인 사고가 가능해졌고, 합리적인 사고, 성찰적인 추론을 통해 인간의 생각은 사회성이라는 특유의 성분을 함유한 '집단 지향성'의 단계로 진화했다.

토마셀로는 『생각의 기원(이데아, 2017)』에서 인간이 다른 유인원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똑똑한 이유를 일반 지능의 차이에서 찾기보다는 협력하고 소통하고 문화 속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특별한 기술을 사용하면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가장 탁월한 능력인 '생각'은 타인의 도움 없이 혼자 존재하고 생존할 수 없었던 '미약함'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생각을 하는 일부 동물들의 '개인 지향성'과는 다르게 인간의 '생각'은 '집단 지향성'을 가졌기 때문에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게 진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식의 시대에서 생각의 시대로

'아는 것이 힘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이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급훈으로도 자주 쓰였다.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시대를 이 한 문장이 대변한다. 성공하기 위해서,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읽고 쓰고 외워서 남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내 머리 속에 담아야 했다. 누적되어 온 지식을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이 습득하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판가름되었다. 그렇게 습득된 지식은 몇십 년 혹은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쓸모가 있었다. 이 시기를 지식기반 사회라고 한다.

< 지식의 시대는 가고 검색의 시대다, 출처=에큐메니안 + WARRENAK 박준기>

인류의 지식은 누적적으로 발전하였고, 시대가 거듭될수록 쌓여갔다. 인간이 지식을 머리 속에 넣는 속도와 능력은 한계를 보인 반면에, 누적되어가는 지식의 양은 기하급수적이었다. 지식의 양이 늘어날수록 쓸모없어지는 지식도 많아졌다. 기존의 지식은 새로운 지식으로 빠르게 대체되어 갔다. 20세기 말,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불어닥친 정보혁명은 지식기반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인터넷과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주도하는 정보혁명은 지식의 생산과 전달, 형태와 본질을 바꿔 놓았다. 그 결과로 지식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접속의 대상이 되었고, 교육과 전수가 아니라 검색과 전송의 대상이 되었다. 개인의 엄청난 노력에 의해 습득되었던 지식은 이제 언제 어디서든 접속해서 검색을 통해 얻어지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지식의 양이 힘과 권력으로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네트워크 속에 넘쳐나는 지식은 쉽게 접속할 수 있고 검색할 수 있는 편리함을 가진 반면에 개별적이고, 미시적이며, 소모적이다. 그래서 수명이 짧다.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생산적인 새로운 지식의 생산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한 지식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새로운 지식은 인간의 사고 능력, 즉 '생각하는 힘'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 『생각의 시대(살림, 2014)』에서 김용규는 '지식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생각의 시대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생각을 만드는 다섯 가지 생각의 도구를 소개한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생각의 도구인 메타포라(은유),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고 조종하거나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생각의 도구인 아르케(원리), 신화에서 철학으로, 운문에서 산문으로, 말에서 글로 옮겨지는 시대에 모습을 드러낸 로고스(문장), 인간이 관찰한 자연과 사회, 그리고 예술 현상을 이해하기 쉬운 패턴으로 표현해주는 생각 도구인 아리스모스(수), 그리고 설득을 위한 생각의 도구인 레토리케(수사)가 그것이다.


진화의 목적에 맞는 생각

선사시대 이래로 인간이 생각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가지게 된 것은 ‘ 나 혼자 살아남기’가 아니라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인간을 위협하는 자연과 다른 포식자들로부터 서로를 보호하고, 더 크고 더 좋은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서 협력이 필요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협력의 범위는 무리에서 집단으로 확대되었고, 우리는 더 많은 생각을 할 필요가 있어서 더 큰 뇌의 용량을 가지는 것으로 진화했다. 인간의 진화 과정을 되돌아보면, 혼자만 잘 살기 위해서는 지금의 큰 뇌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른 어느 동물보다 큰 뇌를 가진 우리는, 뇌가 진화해 온 목적에 맞게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의 DNA 속에는 내가 아니라 '우리',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생각의 힘'이 새겨져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버드 대학교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Osborne Wilson, 1929~)도 『지구의 정복자 (에드워드 윌슨, 사이언스 북스, 2013)』에서 그렇다고 말한다.


'인간의 협동에는 건방진 자를 무너뜨림으로써 협동을 지키고 효율을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서 훨씬 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모두 진정한 이타주의를 실천할 수 있다. 우리는 병들고 다친 사람을 돌보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누군가를 여윈 사람을 위로하고, 심지어 낯선 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무릅쓴다는 점에서 동물 가운데 독특하다.'

< 고 신영복 선생의 글, 손잡고 더불어 >

모두가 남을 위한 삶, 우리를 위한 대의에 올인할 수는 없다. 누구나 성자일 수도 성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서 해왔던 '생각'을, 이제 내 주위와 내 이웃의 '우리'까지 범위를 넓혀 보자. 당장의 눈앞의 조급함에서 좀 벗어나, 몇 걸음 앞선 '미래'를 상상하고 예측하는데 까지 '생각'을 넓혀 보자.

내가 가진 '생각의 힘'이 태초로부터 진화한 목적이 무엇인지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니 지금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이 무엇인지 좀 더 깊이 그리고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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