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중년을 채워야 할 것
사람은 죽을 때 ‘껄껄껄’ 하며 죽는다고 한다. 호탕하게 웃으면서 죽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삶은 되돌아보며 아쉬웠던 점을 후회한다는 말이다. '~했으면 좋았을 껄...' 하면서 아쉬워한다는데, "좀 더 베풀고 살 껄...", "좀 더 용서하고 살 껄...", "좀 더 즐기며 살 껄..." 이렇게 세 가지다. 그래서 '껄껄껄" 한다고 한다. 그중 첫 번째가 '좀 더 베풀고 살 껄'인데, 살아생전에 많이 베풀지 못했다는 후회다. 그 베풂은 돈이나 물건 등 금전이나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재능일 수도 있다. 어쩌면 시간일 수도 있겠다. 물질이든 재능이든 가진 것이 많거나 적거나 할 것 없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서면 그런 후회가 드는가 보다.
물욕을 부리는 사람에게 흔히 말한다. 죽을 때 가지고 가지 못할 텐데 뭐하러 그렇게 집착을 하냐고. 물질의 축적이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성취와 보람의 일종이기도 하겠지만, 그동안 악착스럽게 모았던 물질적인 성취는 결코 단 한 가지도 죽음과 동행하지 못한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나. 그러니 생의 마지막 지점에 서면, 결국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고, 살아 있는 동안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나눠 주지 못함을 아쉬워하게 된다.
오늘 날짜(2018.3.20)로 인터넷에서 '기부'라는 키워드로 뉴스를 검색해 봤다. '장애인에게 스포츠 마사지 재능기부, 영동 박수원 씨', ' 20년 강연료 3000만 원을 해군장학재단에 기부한 해군 노병', ' 전남 드레곤즈 박광일, 김영욱이 지역 아동복지 시설에 기부', ' 컴백 워너원, 소녀교육에 1억 원 기부' , ' 88자원봉사대 조건환경개선 재능기부 앞장, '계근단 김부경 중위, 2년간 기른 모발 25cm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기부' 등 기부의 내용과 형태가 각양각색이다. 어렵게 번 돈을 기부하는 사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남을 돕는데 쓰는 사람, 소중히 기른 머리카락을 기부하는 여군 등.
기부는 물질적으로 많이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여유가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을 기부하는 사람도 많다. 지난 주말에 수원화성을 다녀왔는데, 근처 영동시장 입구 공터에서는 무료급식을 하고 있었다.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는 사람, 식사 후 뒤처리를 하는 사람, 설거지를 하는 아주머니들...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누가 시키지도 않는 일을 모두가 열심이다. 사람들은 왜 자신에게 이득도 되지 않는 일에 그렇게 열심일까? 왜 자신의 돈과 시간을 들여서 봉사활동에 나서는 걸까?
다른 사람에 베풀거나 도와주는 인간의 이타주의는 인간 진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인 인간은 힘이 세거나 더 빠른 동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자연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 여럿이 모여 서로 돕고 의지하는 공동생활이 이루어지게 된 가장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이유가 인간 자신의 안전이요 생존이다.
진화생물학의 이타주의 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 있다. 박쥐다. 그것도 동물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박쥐다. 흡혈박쥐는 영문 이름이 뱀파이어 박쥐(Vampire Bat)인데, 이름도 으스스한 데다가 피를 빨아먹는 이빨을 드러낸 모습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때로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공수병을 옮기기도 하는 존재이지만, 진화론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행동을 하는 동물이다. 바로 피를 나누는 습성이다.
중남미 열대 지대에 서식하는 흡혈박쥐는 밤마다 소나 말 또는 맥 같은 큰 동물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데, 워낙 신진대사가 빨라 연이어 사흘 밤만 피를 빨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래서 흡혈박쥐 사회에서 서로 피를 나눠먹는 풍습이 진화했다. 윌킨슨(Gerald Wilkinson)의 연구에 따르면 흡혈박쥐는 누구보다도 친척과 가장 빈번하게 피를 나눠먹지만, 오랫동안 가까운 자리에 함께 매달려 있는 짝꿍에게도 피를 나눠주고 또 훗날 피를 얻어먹기도 한다고 한다. 이들은 서로를 분명히 인식하며 오랫동안 호혜관계를 유지한다. 이들이 피를 빨지 못하고 돌아오는 확률에 의거하여 예상 수명을 계산해 보면 태어나서 3년을 버티기 힘들다는데, 피를 나눠먹는 전통 덕택에 흡혈박쥐는 야생에서 무려 다섯 배인 15년 이상을 살기도 한다니 피를 나누는 습성이 이들에게 가져다주는 이득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우리 인간도 서로 나누고 돕는 행동이 수명을 다섯 배, 아니 단지 몇 년이라도 늘리는 것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면 모두가 그런 행동에 나설 것이 명백하다.
해밀턴의 친족 이타주의(Kin altruism)에 상응하여 호혜성 이타주의(Reciprc al altruism)라고 명명된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res, 1943~ )의 이론에 의하면,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미래의 보답을 기대하며 남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로 인해 인간을 비롯한 많은 동물들의 사회성이 진화했다고 한다.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효율적 이타주의자(2016, 21세기북스)』 책 표지에 이런 문구가 있다. '4만 달러로 1명을 도울 것인가? 2000명을 구할 것인가?' 그 아래에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다. '미국 시각장애인 안내견 1마리 훈련 비용 4만 달러, 개발도상국 드라코마 환자 실명 위기 치료 비용 20달러'.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견 1마리를 훈련시키는 비용(4만 달러)이면, 트라코마(trachoma) 감염 환자를 치료하여 환자 2000명의 실명을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쉽지 않은 선택이다. 위에서 나열된 숫자로만 판단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만약 시각장애인과 함께하는 안내견의 감동적인 스토리가 담긴 홍보 영상을 보거나 듣는다면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 수도 있고, 개발도상국의 드라코마 환자들의 안타까운 실상과 그의 가족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알게 된다면 또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 수도 있다. 아니면 안내견 훈련 비용을 줄여 그 돈으로 드라코마 환자 일부를 치료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할 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도덕적 판단을 어려워하며, 이성과 데이터보다는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인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보통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감정이 먼저 나아가지 않으면 행동도 쉽게 따라가지 못한다. 마음이 아프거나 동정심이 일거나, 마음 즉, 감정이 먼저다. 돈이 얼마나 드는지,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인지, 같은 금액으로 몇 명을 도울 수 있는지 등 효율성과 경제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은 다르게 말한다. 효율적 이타주의란, 세상을 개선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이성과 실증을 통해 모색하고 실천하는 철학이자 사회운동이다.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은 심금을 울리는 곳에 기부하지 않는다. 즉 감정적으로 판단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가용 능력이나 시간이나 돈으로 가장 많은 선(善)을 이룰 수 있는 곳에 기부한다.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기부와 나눔이 아니라, 기부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경향은 사회에 막 뛰어든 밀레니엄 세대일수록 더 강하며, 젊은 세대는 효율적 이타주의를 열정적이고 지적으로 수용하고 있어 가시적인 운동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한다.
효율적 이타주의 운동은 절대 빈곤에 따른 고통과 죽음을 효과적으로 감축하는 자선단체를 따져 기부함으로써 세상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사실 불우 이웃돕기 성금, 연말연시의 자선냄비, 국군 위문금(이게 아직까지 왜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사랑의 열매 등에 내는 기부금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쓰이며, 어떤 효과를 내는지, 우리 대부분은 알지 못한다.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못한다. 더더구나 이런 자선단체에 기부된 돈이 엉뚱한 곳에 쓰이기도 한다는 뉴스를 볼 때면, 정말이지 화가 치민다. 그 단체에 기부를 했던, 그렇지 않든 마찬가지다. 기부 금액의 많은 부분이 자선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의 인건비로 쓰이고, 실재로 기부되는 금액은 적다거나, 자선단체의 회장이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 비행기 1등석 좌석과 특급호텔만 고집했다는 기사를 접할 때면, 과연 기부라는 행위를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부에 동참한다. 기부한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더라도, 단지 기부를 하고 있다는데 만족하는 걸까. 기부라는 행위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성취감을 얻는 방법이다. 직접적으로는 남은 돕는 일이기도 하지만, 간접적으로는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주는 행위도 되므로 자신을 돕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기부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스스로 만족감에 행복해하고, 기부된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일까? 효율적 이타주의 운동은 인간은 원래 본능적 욕구와 감정적 반응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는 철학과 심리학의 오래된 전제에 의문을 던진다. 남의 돕는 행위에 본능과 감정이 아니라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증적 데이터 분석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처럼 기부와 이타적 행위의 효율성을 높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제한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효율적 이타주의에서 강조하는 이성과 데이터보다 여전히 감성과 마음의 움직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우리의 마음 움직임을 이성적으로 통제할 것 까지는 필요하지 않다. 인간의 이타적 행위는 손익계산을 따지거나 스스로의 만족감만 충족시키는 목적이 아니다. 다만, 이타적 행위에도 이성적인 효율성을 가미한다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손길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남을 돕는 행위가 스스로 만족감을 가지는 것에 머무르든, 이성과 데이터를 앞세운 효율적 이타주의를 신봉하든, 예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폴 블룸(Paul Bloom)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인류 전체가 가족으로 인식되는 세상이 미래의 희망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세상은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생면부지 남에게 공감까지는 못해도 남들의 삶이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삶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세상을 희망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폴 블룸이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은 모두 동등하다는 거다. 뉴욕의 부자 동네에 사는 사람이든, 소말리아에서 하루 한 끼로 연명하는 사람이든 모두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자는 거다. 남을 돕던 그렇지 않던 최소한 거기까지는 해야한다는 절심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