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섰다. 세상은 아직 밤이다. 아니 밤과 새벽의 경계에 있었다. 떠나기를 거부하며 버티는 어둠 속으로 그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빌딩 테두리가 어스름이 비친다. 가로등 은빛 불빛이 바람에 너풀거린다. 자동차의 짙은 타이어 소리가 어둠을 찢어 내면서 차가운 회색 유령이 아스팔트 위에 흔들거리며 나타났다. 그리고 이내 사라져 버렸다. 적막 사이를 찬 공기가 점령하고 있다.
어디선가 새벽이 피어나고 있다. 연보랏빛 새벽 색깔이 무거운 밤을 밀어낸다. 언제나 그렇듯이 빛이 세상을 향해 올라오고 있다. 바다 저 건너 뚝 떨어지는 낭떠러지 그 어느 곳에 쉬고 있던 붉은 덩어리가 불끈 위로 솟구친다. 아래로만 떨어지는 중력의 영향을 벗어난 저기 바다 건너 깊은 절벽, 이글거리는 태양이 밤마다 쉬었다 생기 찾는 곳, 거기는 다른 물리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러니 떠오를 수밖에. 저것 너무 뜨거워서 주변에 큰 열 회오리 만들어 내며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가? 새벽 향기 느끼며 그는 지금 해운대를 걸어가고 있다.
공학을 전공한 그 지만 과학을 신봉하지 않는다. 논리로 즐기며 철학을 유희 삼지만 그것이 그의 믿음은 아니다. 정신을 이해시키고 해독하는 것은 이성과 논리가 아니라고 그는 믿고 있다. 정신 갈증을 덜어주고 희망으로 가득하게 하는 것, 그것이 그의 유일한 신앙이다. 과학으로 설명되는 천채의 비밀을 그는 믿지 않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에 현재를 맞춘다. 그것이 살아가는 처세 이기도 하다. 매일 태양이 바다 끝 낭떠러지에서 솟아오르며 세상에 나타나는 이 기막힌 현상을 보며 그는 갈증을 푼다. 그래서 그에게는 매일이 다르다. 그는 일출을 정말 좋아한다. 그가 용호동에 살 때에는 해운대 너머에서 떠오르는 해를 만나기 위해 아침마다 이기대를 향해 뛰었다. 이기대 해변 산책길 어느 곳에서 시간 맞추어 아침을 보기 위해서다. 생명이 피는 매일의 축제. 그는 그것을 느낄 줄 안다.
그는 걷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천천히 걸으며 생각하고 주위를 본다. 하늘도 보고 나무와 숲을 살피며 걷는다. 예쁜 꽃에 감동하고 느낌 놓치기 싫어 사진도 찍는다. 대중교통 이렇게 잘 되어 있는데 왜 자동차라는 거대한 기계 짊어지고 사는가? 그의 지론이다. 뜨거운 여름철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사무실을 향해 걸어 다닌다. 땀 흘리며 고생하며 걷지 않는 사람은 계절 좋은 봄과 가을 느낄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안다. 세상이 연녹색 여린 생명들 가득하면 새 생명의 부활 사건이 자기 일인 양 골똘히 생각하고 감사한다.
그는 4월과 5월의 녹색을 사랑하고 즐기고 느낀다. 요즈음의 신록은 그에게 자양분이다. 그는 언젠가부터 젊음을 신봉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가장 귀한 것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연두색 빛깔은 잠깐이지. 일 년에 그것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너무 짧아. 우리 삶도 그렇지. 나에게도 연두의 시절이 있었나? 아직 기억 속의 연두는 그리 오래가 아닌 것 같은데 육체는 그것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니. 글쎄 말이야.
그는 환갑을 맞는다. 그러니 젊음이 그리울 수밖에. 작은 봉오리가 터져서 연두색을 발하며 세상에 눈뜨는 환희를 알 나이가 되었지. 솜털 하나, 개수까지도 정확히 기억하며 세상에 내놓는 신비. 언제부턴가 봄을 사랑하고, 가을이 싫어졌던 거야. 가을이 최고라고 손들어 말하던 그였는데. 그래 그도 나이가 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