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바다 바람이 창문과 만나고 공간에 빨려 드는 소리를 오히려 좋아하고 즐긴다. 이 창문, 저 창문, 크기와 속도와 시간을 달리 하면서 두들기는 파열음이 너무 좋다. 타악기의 오케스트라, 그리고 바람의 관악기가 들려주는 간헐적 카덴짜, 훌륭한 자연의 연주다. 베토벤이 그랬던가, 협주곡 악보 크라이맥스를 빈 공간으로 남겨 놓았다. 온전히 연주자가 채워 넣을 자기 만의 느낌과 감동으로 그려 넣을 수 있는 공간, 카덴차를 비워 놓은 것이다. 이 세상에 그 순간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연주, 그것을 베토벤은 듣고 싶었다.
소리 들과 호흡과 숨결을 같이 맞추느라 잠자지도 못하고 이른 새벽 눈을 떴지만 그는 설레고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서재로 들어가 어둠과 소리를 운율에 맞추며 즐기고 있었다. 매끄러운 창문에 점묘화처럼 박아 놓은 빗방울 자국과 그것이 흘러내리고 있는 자국들. 물방울들의 맺힘과 희뿌연 농도로 그려진 수직의 여러 갈래길. 기막힌 물방울 점묘화가 그려진 창 캠바스 위에 새벽 가로등 불빛이 엷게 비친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 것처럼 서재 창문 앞에 그려졌다. 그는 이 그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멍하게 바라보곤 했다. 아스라이 제 모습이 찍힌 저 너머의 공간. 그 속에 들어가면 지금과 다른 자기 모습이 있는 것 같다.
모습은 비슷하지만 지금 과는 다른 내면이 들어 있는 새로운 자기. 그 형체를 바라보며 그는 깊게 빨려 들어갔다. 사실 이 자기 얼굴을 핸드폰으로 몇 번이나 찍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여러 번 가족 톡방에 올렸다. 예쁘고 신기하게만 그려진 그 작품 속에 또 다른 그의 마음이 들어가 있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남들이 보는 지금의 얼굴과 매우 다른 형체가 저기 물방울 속에 찍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 보는 그의 몸을, 타자가 보지 못하는 자기 모습으로 다르게 보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놀란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하나의 얼굴을 가진 것이 아니다. 어쩌면 2개, 3개. 어쩌면 5개 이상 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에는 이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고, 어느 날에는 전혀 다른 얼굴이 아내에게 나타난다. 하나인 것 같지만 여러 개의 얼굴이 존재하는 신비의 생명체, 그것이 인간인지 모른다.
푸르스트가 말했다. 영혼은 악한 모습보다 더 풍요롭고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고. 그래서 내 모습은 날마다 다르게 나타나는지 모른다고. 어제 보인 모습과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한 번은 악마의 얼굴로 들이대다가도, 같은 얼굴이 선한 얼굴이 되기도 한다. 동일한 인간에게서 다른 모습들이 함께 살고 있는 이상한 현존, 그것이 사람 인지도 모른다.
그는 말했다.
인간을 결코 원망해서도 안되고, 어떤 사악한 행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인간을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그들의 영혼은 다른 순간에 진심으로 원해서 착한 일을 실천할 수 있다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도 풍요로운 선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그들도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해 본다. 과거에 저지른 실수와 오류로 그를 판단하는 사람에게 또 다른 자기 얼굴을 보여 주고 싶다고. 그래서 자기의 다른 모습이 주는 기쁨들을 그들에게 보이고 베풀고 싶다고. 그리고 여러 개의 다른 얼굴을 가진 인간을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하고 판단하지 말자고. 그래야 자기도 다시 살 수 있다고.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창가에 그려진 다른 사람이 전혀 알 수 없는 새로운 얼굴을 그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