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엄청 불었다. 빗방울이 창을 때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밤이 새도록 콩 볶듯 타악기를 두드렸다. 보일러실 환기구를 비집고 나온 소리가 현관을 지나며 몹시도 쌕쌕거렸다. 오토바이 타고 전력 질주할 때 귓가에 들리는 소리다. 벌써 며칠간 계속되고 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곤 했다. 창가에 맺히는 물방울을 워낙 좋아해 서재 등을 켜고 창을 물끄러미 바라 보기도 했다. 이틀간 좋아하는 제자를 집 근처에서 만났다. 엄청난 바람에 많이 놀랬다 한다. 어제 저녁 먹으며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거리는 키 낮은 풀들을 보면서 생명력에 놀랐다. 제법 긴 키의 야생화가 마치 진자의 추처럼 흔들거리면서도, 여린 줄기 끝에 달린 꽃을 놓지 않았다. 김수영의 시처럼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만' 시련에 더 강하게 성장한다.
장마철 이맘때가 되면 자연의 변화에 많이 놀란다. 끝없이 쏟아지는 폭우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과학을 모르던 옛사람은 '저렇게 많은 물을 어떻게 하늘 창고에 숨겨 둘 수 있는가?' 하며 궁금해했다. 매 순간 변하는 자연은 우리를 놀라고 경탄하게 한다. 우리는 거대한 자연 속에 기거하는 작은 존재 들이다. 사람들이 문명을 만들며 지구의 주인이 되면서부터 자연을 지배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말았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자연 속에서 그의 일부일 뿐이다. 요즈음과 같은 장마철이 되면 이것을 새롭게 느끼게 된다. 최고라고 여기던 존재가 조금은 겸손해진다. 세차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캠퍼스를 내려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커져 버린 마음을 가슴으로 움켜쥐었다.
바람도 멎었다. 비도 그쳤다. 세상은 다시 조용해졌다. 푸른 하늘이 나타났다. 뭉게구름이 하늘 넓은 곳을 차지하며 이리 저리로 움직인다. 태양이 뜨겁게 내린다. 습기가 잔뜩 묻은 대기로 온몸이 찐득 거린다. 장마전선이 이삼일간 중부지방에 머물다 다음 주엔 남부지방에 비를 쏟아낸다고 한다. 요즘 특별한 일 없지만 매일 약속이 있고 심의로 다니고 있다. 방학중에 해야 할 목록도 짜 놓았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으로 살고 있지만 내면은 조용하지 않다. 삶은 안정된 것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며 '흔들리는 것이 좋아'라고 글도 쓰기도 했지만, 그건 그냥 바람일 뿐이다.
며칠 전 '행복학교'라는 말을 법륜스님께 들었다.
마음공부와 사회적 실천이 행복을 준다고 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뜻 맞는 젊은이와 만일결사를 했다고 했다. 백일도 천일도 아니고 30년, 만일을 실천하고 있다 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1시간 마음공부, 하루에 천 원 보시, 그리고 매일 좋은 일 한 가지 하기. 그의 말을 들으니 내가 즐겁지 않은 이유,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분명해졌다. 마음공부는 열심히 하자고 생각하지만, 내게는 실천이 없다. 지식으로 결코 알 수 없는 실천의 신비를 배워야 한다. 좋은 실천이 습관이 될 때 좋은 인생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것을 타인에게 주는 것에 나는 너무도 인색하다. 거의 그런 일을 해 보지도 않은 것 같다. 사실 나를 위해 그렇게 해야 하는데도 나는 그것을 할 줄 모른다. 가지면 더 빈곤해지고 주면 가득 찬다는 귀한 교훈도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은 내게 하는 말이 분명하다.
이제 시작해야겠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못해서 되겠는가? 가슴을 파고드는 교훈뿐이면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한가? 작은 실천이 주는 기쁨을 알지 못해서 되겠는가? 지식으로 살지 말고 행함으로 살아야 한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흔들리고 부족한 것은 나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다른 곳을 쳐다보아야 한다. 하루 이천 원씩 모아야겠다. 학교 커피 한잔 가격이니 커피 마시지 않겠다. 어차피 위장도 좋지 않으니 잘 됐다. 정말 작은 돈이지만 실천하겠다. 이천 원의 기쁨을 맛보면 더 큰 기쁨으로 크게 나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루 한 가지 좋은 일 하겠다. 만나는 사람에게 무엇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작은 것 실천하겠다. 아침마다 하나님 대하는 시간 놓치지 않겠다.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으니 희망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필요 없이 행할수 있으니 얼마나다행인가? 지하철 타고 오는 길에 약간 힘들어하는 아주머니가 옆에 있어 표 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옆칸으로 건너가 섰다가 자리가 나서 앉았다. 갑자기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와서 정중하게 고개 숙이며 인사하며 고맙다 했다. 내가 내리는 줄 알아 인사도 못했다 하시면서. 내가 좋기 위해서 행한 지극히 작은 선행이 기쁨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