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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날 Feb 18. 2023

생파 아니고 생카

너와 함께한 시간

2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 11시 40분.

20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도 줄이 꽤 길다.

6학년 딸아이 손을 따라 30여 명 남짓한 줄 끝에 슬그머니 섰다.

어색한 시선으로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내 또래,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에 있는 것이 나보다 더 안 어울려 보이는 40대 아줌마가 있는지.

다행히 10대들 사이에 시치미 뚝 떼고 홀로 서있는, 나보다 더 어색해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있다.

괜히 처음 본 그에게서 내적친밀감이 생기며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나는 지금 아이돌그룹 NCT 재현의 생카에 입장하려고 오픈시간을 기다리는 중이다. 학창 시절 추억의 노래인 HOT의 캔디를 NCT가 리메이크한 덕에 차 안에서 몇 번 듣고 흥얼거려 본 지라 생판 모르는 남자 생카에 온 것은 아닌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참! 노파심에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생파 아니고 생카다. 뭐 엄마카드, 체크카드 그런 카드 아니다.


생카: 생일카페의 준말, 좋아하는 연예인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일정기간 연예인의 사진이나 관련소품으로 꾸며서 연 이벤트 카페. 음료를 주문하면 연예인의 얼굴이 인쇄된 컵홀더와 함께 포토카드, 엽서 등의 굿즈를 나누어 주기도 한다.


딸아이 덕에 처음 알게 된 '생카'라는 단어, 그곳에 직접 와볼 줄이야.


역시 10대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주를 이룬다. 다들 집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마냥 들떠있다.

누가 봐도 얼굴은 앳돼 보이는데 아이라인에 볼터치까지 곱게 화장한 아이, 마치 아가씨처럼 딱 붙은 화이트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이, 명품 비슷한 스타일의 조그만 토트백을 들고 있는 아이, 단추는 잠글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긴 손톱에 휘황 찬란 네일아트를 하고 있는 아이, 다들 한껏 멋을 부린 듯하다. 어른 흉내를 낸 것 같은 모양새가 귀엽기도 하고, 조금 과한가 싶어 염려되기도 하고, 그냥 요즘 아이들 스타일이 그런가 보다 이해되기도 하고. 기다리는 동안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살피느라 지루하지 않았다. 군데군데 공부만 할 것 같은 모범생 냄새가 나는 아이들도 눈에 띈다. 이 무리에 껴있는 내 모습이 낯설지만 오랜만에 만나보는 10대들은 자체로도 맑고 경쾌하다.






12시 정각 카페의 문이 열리고 차례차례 주문을 한다. 40 SET 한정으로 포스터와 유리컵, 포토카드, 사진이 박힌 컵홀더를 함께 주는 특전을 사기 위해 일찍부터 줄을 선다는 것은 주문할 차례가 되어서야 알았다. 만원을 내밀며 '재현세트 주세요' 하는데 왜 이렇게 쑥스럽던지.


옹기종기 모여 카페 안을 둘러보고, 특전을 뜯어보는 아이들은 꺄르륵 웃음소리가 떠나질 않는다. 왠지 귀여운 망아지들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겨우 자리 하나 잡고 앉은 딸아이도 똑같은 사진을 이리 찍고 저리 찍고, 포토카드를 넣어서 찍고 빼서 찍고, 유리컵을 이쪽으로 놓았다, 저쪽으로 놓았다 찍고, 찍고 또 찍고.

우리 때는 빨라도 중학생 아니면 고등학생이나 돼야 연예인 덕질을 했던 것 같은데 초등학생인 딸이 저러고 있는 거 보니 요즘 애들은 참 다르구나 새삼 느껴지더라는.


 








미안하게도 나는 NCT의 팬이 아닌지라 생카에 큰 감흥은 없었다. 그저 생소한 경험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

허나 아이가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함께 하는데 보낸 시간은 의미가 있다. 다 사라져도 시간은 남는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때,  주부들이 경력단절을 염려하며 다시 뭐라도 시작해보려 하는 시기에 오히려 일을 관둔다니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 같이 하는 말이 있었다. 그 당시 4학년이던 아이를 두고 '이제 곧 있으면 친구 찾지 엄마 안 찾아, 엄마 필요 없어'  '얼마나 잘 키우려고, 엄마가 집에 있다고 애 잘 크는 거 아니야'라고.


아이만을 위해서 퇴직을 결정한 것은 아니다. 내가 일을 그만둠으로써 아이를 더 대단하게 키워보겠다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제 엄마가 일까지 그만두었으니 오죽 잘 키우겠어'라는 격려 뒤에 숨겨진 '어디 한번 얼마나 잘 키우나 보자' 하는 심보에 말하고 싶다. 혹여 아이가 주변에서 기대하는 만큼 대단한 성과를 이루지 못하더라도(사실 대단한 성과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남을 것이라고. 함께 보낸 시간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카니 특전이니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라도 그저 그날 아이와 같이 그 공간에 있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나는 그렇게 전업주부가 되어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옳고 틀리고,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리라.


딸내미 최애 그룹 아이브 가을의 생카가 9월에 서울에서 열린단다. 이젠 너무나 멀어진 서울. 이따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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