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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날 Feb 03. 2023

그날, 당신을 만나 행복했어요

그날, 그 집에서 당신을 처음 만난 날 조금 낯선 마음이 들었어요. 살짝 경계도 했죠. 각진 얼굴에 유난히 광이 나는 하얀 피부가 참 예뻤던 당신.


당신이 그날 그곳에 있을 줄은 몰랐어요. 2박 3일 함께 머무르게 될 줄은 더 몰랐죠. 평소 이야기를 들어온 터라 당신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함께 지낸 적도, 당신을 겪어 본 적도 없기에 걱정이 됐어요. 제가 낯을 조금 가리거든요.


처음 만난 당신을 슬그머니 의심도 했어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그저 세련되기만 한 숙맥 같았거든요.

원래 예쁘면 주변에서 늘 시기질투를 하잖아요.

그렇게 너그러이 이해해 주길 바라요.


한데 당신은 참 부지런하고 야무지더군요. 부주의하지도 않았어요. 늘 조용조용  제 곁을 지켜주었고, 가장 고단한 시간을 외롭지 않게 해 주었어요. 저처럼 힘들다는 불평불만도, 하기 싫다는 꾀도 부리지 않더군요. 오히려 고된 시간이 끝나면 당신은 제게 온기까지 전해주었지요. 불쑥 피어오르는 따뜻함이 제 손끝까지 포근하게 전해져 벙긋 웃었답니다. 그러면 당신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하얗고 새침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죠.


당신은 어찌 그리 깔끔하고 야무지신가요?


이제 난 당신을 믿어요.

다음 명절에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해 설날 당신을 만나 진심으로 행복했어요.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2023년 설날 내가 처음으로 만나 진심으로 행복했던 존재가 누구였는지. 그는 바로 시댁에 놓인 ‘식기세척기' (하하하)




이번 설에 시댁을 가니(정확하게 말하면 시동생 부부 집, 시부모님이 함께 살고 계심) 작년 추석까지도 없던 식기세척기가 싱크대 위에서 그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맞벌이를 하는 동서가 살림을 많이 도와주시는 어머님을 위해 겸사겸사 구입했다고.


시댁은 제사를 지내지 않기에 차례음식을 따로 준비하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세 시간째 전을 부치고 있다는 여느 며느리들의 명절 노동담은 내게 해당사항이 없었다. 오롯이 우리 식구 8명(우리 집 3명, 동서네 3명, 시부모님) 먹을 음식만 차리면 되고, 이마저도 음식솜씨가 좋고 손이 빠르신 어머님이 뚝딱뚝딱해 주시니 동서와 나의 주요 명절노동은 늘 설거지였다.(여기서 시댁에 있을 때 느끼는 왠지 모를 압박감, 초조함, 어색함 같은 심리적 노동은 제외하겠다)


한데 평소 우리 집 세 식구는 설거지거리를 줄이려 그릇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가급적 접시를 많이 꺼내지 않는 것과 달리 어머님은 식사할 때마다 자꾸자꾸 새 그릇을 내놓으신다. 메인요리 접시, 국 앞접시, 반찬 앞접시, 갈비뼈 버리는 접시, 기타 접시 등등. 지금보다 철이 덜 들었던 신혼시절에는 우리가 식사 때 사용한 그릇뿐만 아니라 냉장고 속에 오래 묵혀둔 반찬 그릇들까지 죄다 꺼내서 자꾸 설거지통에 담으시는 것 같다는 쨉실한 생각마저 들었다.


명절 때만 되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그릇무더기를, 그것도 하루 세 번 양치하듯 꼬박꼬박, 티타임도 없이 상 치우기가 무섭게 바로 해야 하는 것이 여간 귀찮고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거실 소파에 앉은 건지 누운 건지 모를 자세로 TV리모컨을 돌리고 있는 남편을 보면 어찌나 부아가 치밀던지.






사실 나는 식기세척기를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아이 어릴 때 출퇴근을 반복하며 혼자 정신없는 일상을 보낼 때도, 그래서 설거지를 미루고 미루다 더 이상 꺼내 쓸 그릇이 없는 지경에 이르는 날이 허다할 때에도, 어린이집 식판 하나 씻는 것조차 힘에 부쳐 건너뛰는 날이 쌓여 결국 여러 개 구입해 돌려 막기 하던 시절에도 식기세척기 구입은 생각하지 않았다.  

자고로 설거지란 사람 손으로 직접, 보글보글 세제거품을 내서 박박 닦고 뽀득뽀득 헹군 다음, 뜨거운 물 한 번 촥 찌끄려야 제 맛 아닌가. 사람도 그릇도 그리해야 개운할 거라 생각했다. 그땐 그랬다. 이상한 믿음이었다.


올해는 달랐다. 싱크대 옆에 얌전히 올라앉아 있는, 새하얗고 네모 반듯한 식기세척기의 여우 같은 재주를 알아버렸으니. "형님~ 이번엔 설거지할 거 없어요." 하며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을 가볍게 헹군 후 세척기 안에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동서. 고운 손에 세제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 작정한 듯 그 많은 양의 그릇을 켜켜이 잘도 얹는다. 어머님은 그렇게 거꾸로 쌓으면 설거지가 되겠냐고, 전기세, 물세를 염려하며 슬쩍 눈을 흘기시지만 그럴수록 더 착실하게 집어넣고 꼼꼼하게 포개어 올린다.


설거지는 식세기에 맡기고 그 집 아들들, 그러니까 동서와 나의 남편들이 앉아 있는 소파 끝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신다. 왠지 커피 향에서 콧노래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이건 뭐 2년 전 건조기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신세계구나.(야호)






고백할게요. 설날 가족들을 오랜만에 만나 행복했지만,

솔직히 전.. 식세기 당신을 만나 제일 행복했어요~






[사진출처: pixabay, 삼성전자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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