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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날 Feb 23. 2023

루틴 중독녀

자기계발 좀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미라클 모닝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루틴이 아닐까 한다. 자기계발이라면 나도 빠질 수 없지. 루틴이라는 말을 꽤나 사랑하는 사람이다.


습관적으로 이 말을 달고 살았는지 하루에 유튜브 보는 시간이 '딱 40분' 허락된 아이도 "해야 할 일 먼저 하고 보는 게 어때?" 하고 권하면 "유튜브 먼저 보고 공부하는 게 내 루틴이야"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하물며 우리 집은 함께 사는 고양이도 루틴이 있다. 매일 우리와 비슷한 시간대에 자고 일어나 기지개 한번 길게 켜고, 스크래처에 발톱을 시원하게 긁은 후 사료그릇으로 향한다. 고양이의 평범한 일상이건만 우리 모녀는 크림(우리 집 냥이) 이도 루틴이 있다며 대견해한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갑자기 시간부자가 되었다. 장점은 내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 단점은 내 시간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 까딱하다간 오늘 뭐 했더라? 하며 기억에서 나의 하루가 통째로 사라져 버리는 마법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는 것. 눈뜨고 코베인 기분이랄까?


전업주부인 내가 출근하던 시절보다 더 일찍 일어나는 것이 아이러니했지만, 달콤하긴 하나 게으른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 아침 루틴을 만들려 애썼다. 그 간 시도했던 것들 중 몇 가지만 나열해 보겠다.



1. 모닝페이지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웨이>를 읽고 내 안의 창조성을 깨워준다는 모닝페이지 적기에 돌입했다. 글쓰기를 좋아한다 믿었던 나는 넘치는 의욕과는 다르게 3페이지 분량을 채워야 하는 것에 미리부터 겁먹고 A5 작은 노트를 선택. 띄어쓰기도 어마무시하게 하며 꾸역꾸역 페이지를 채워나갔다. 2주쯤 썼나? 모닝페이지가 점점 뒷담화의 장이 되어가는 것을 느끼며 계속 쓰는 것이 유용한가?라는 생각에 슬그머니 포기했다. 뒷담화의 주요 인물인 남편이 내 공책을 볼까 싶어 꼭꼭 숨겨놓지 않아도 되니 편해지더라. 하하



2. 확언 쓰기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매일 10번씩 100일 동안 쓰기다. 터무니없는 이야기 같지만 <시크릿>이라는 자기계발서를 읽고 '끌어당김의 법칙'에 끌리고 있던 터라, 확언 명상을 보며 매일 소리 내어 읽고 따라 쓰기 시작했다. 나는 꿈을 이루어 가는 사람이다, 나는 꿈을 이루어 가는 사람이다... 이게 될라나... 이렇게 하면 끌어당겨지는 건가...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한 채 24일을 쓰다 흐지부지. 에구구



3. 감사일기

매일 3개~5개 정도 감사할 일을 찾아 적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허나 웬걸? 평소 이렇게 감사할 줄 모르는 되바라진 사람이었나? 할 정도로 떠오르지 않더라. 돌려 막기 식으로 비슷한 듯 다른 감사거리를 쓰다 나중에는 우리 집 냥이에게도 잘 먹고 잘 자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표했다. 부끄



4. 108배 절운동

언젠가 TV 예능 프로에 배종옥 배우가 나와 아침루틴으로 108배를 한다며 절운동 예찬을 하더라. 땀이 송골송골 날 정도로 열이 오르는 전신운동이며,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효과가 있다고. 속에 화가 많았던 나는 바로 이거다! 하며 절운동 방석을 구입했다. 어쩐지 방석이 있어야 자세도 잘 나올 것 같은 느낌. 오래가지 못했다. 일단 무릎이 아팠고, 슬프게도 재미가 없었다. 화가 더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랄까. 헤헤



이외에도 이른 아침시간에 명상, 홈트, 독서, 경제신문 보기, 영어원서 듣기, 읽기, 필사, 글쓰기 등 온갖 잡다한 것을 조금씩 시도했다. 이것저것 찔끔찔끔 하다 이도저도 안돼 실망하는 날이 쌓였고, 실망하는 날엔 그냥 늦잠이나 자는 게 낫겠다며 스스로 합리화했다.  





시작 지점에서
완벽한 습관을 만들려고 애쓰는 대신,
쉬운 일을 더욱 지속적으로 행하라.

                                 제임스 클리어<아주 작은 습관의 힘>



잦은 시행착오 후 완벽해 보이는 그럴싸한 습관보다 내가 꼭 만들고 싶은 습관과 좋아하는 일로 시간을 채워보자 생각했다. 지속할 수 있게 최대한 작고 쉽게, 구체적으로 세운 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다이어리에 체크표를 만들어 기록했다. 기록을 남기니 제법 오래 지속된다.



요즘 눈뜨자마자 시작되는 모닝루틴은

침대에 누운 채로 확언명상 듣기(5분) → 역시 침대에서 기상 스트레칭(10분) → 거실로 나와 미지근한 물 한잔, 유산균 먹기 → 홈트(10분) → 커피 마시며 다이어리 쓰기(5~10분) → 모닝독서(30분) → 브런치 글쓰기(30분)



(좌) 다이어리 체크리스트  (우) 나름 루틴 있는 냥이^^



침대에서 바로 시작할 수 있으니 미적거림이 줄었다. 일어나자마자 물 한잔 마시는 것은 연초 나의 습관 만들기 계획 중 하나였는데 반복하다 보니 자동화가 되더라. 기상=거실=물 한잔. 한때 다이어트를 한다며 1시간씩 하던 홈트를 끊은 지 몇 달. 다시 시작하려니 하기도 전부터 꾀가 나 짧고 강력한 홈트를 선택했다. 실제 이 홈트는 10분만 해도 땀이 맺히고 숨이 차지만 그까짓 10분쯤이야. 기꺼이 기어코 하게 된다.


독서와 글쓰기는 내가 좋아하는 일. 모닝독서시간엔 평소 잘 읽지 않는 분야의 책을 한 챕터씩 나눠 읽고, 잘 쓰고 싶어 오히려 미루던 브런치 글쓰기는 아침 30분 동안 한 문장이라도 써보자, 안 써지면 글감 생각이라도 해보자 작정하니 30분이 1시간이 되는 날도 있더라.






물론 여전히 늦게 일어나는 날도 있고, 느슨해지는 주말에는 지키지 못하는 날도 많다. 그러면 어떤가. 작고 쉽고, 내가 좋아하는 일로 만든 루틴이니 또다시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는 걸. 내 상황에 맞게 변경하고, 느슨하게 다시 짜도 된다. 루틴이 빽빽해야 성공한 인생은 아니니까.


이제 정시출근 할 곳은 없지만 루틴은 있는 여자.

오늘도 조용히 루틴을 실행한다.

아이가 개학하는 3월엔 또 어떤 루틴으로 하루를 채울까.

루틴 중독녀는 생각만으로도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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