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날 May 20. 2023

속없이 사는 어른입니다

일주일에 딱 두 시간

대단히 철든 어른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 번, 더 속없이 사는 시간이 있다. 바로 동시 배우는 시간.

마흔 넘어 무슨 동시냐며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어쩐지 나도 민망해서 주변에 알리지 않았고, 굳이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사실 제가 배우는 게 있는데요.. 들으면 좀 웃길지도 몰라요"하고 밑밥을 깔며 뜸을 들였다.




문학관 동시수업 첫날 열 명이 조금 넘는 학인들이 띄엄띄엄 앉아있다. 자리의 위치를 보면 사람들의 성격이 나오는 듯하다. 제일 앞줄에 앉아 선생님 물음에 적극적으로 대답하는 사람, 맨 뒷 줄에서 널리 관찰하는 사람, 있는 듯 없는 듯 구석 창가자리를 고수하는 사람, 정중앙에 앉아 모두의 시선을 즐기는 사람. 나는 어딜 가든 중간보다는 살짝 앞줄, 사이드에 앉는다. 관심받는 것은 쑥스럽지만 그렇다고 아예 방치되는 느낌도 싫은 내 마음을 반영한다. 신기한 건 첫날 앉았던 자리는 대체로 다음시간에도 비슷하게 앉게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더라. 성격을 반영하는 게 틀림없다.


강사님은 초등학교장으로 정년 퇴임하신 남자선생님이다. 신춘문예에 당선도 되신 40년 경력의 동시작가님. 매시간 우리에게 동시를 쓰려면 좀 속없이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분이다. 그 덕에 자신도 동안외모를 유지하면서 동시도 쓰고 강의도 하며 즐겁게 살고 있다고. 아내에게 속없다 잔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그때는 그냥 '아멘'을 외친단다. 참 유쾌한 분이다. 선생님 덕분에 동시수업을 갈 때마다 초등학교 어느 시절로 돌아간 듯 들뜬다.


수업 첫날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얼마만의 자기소개인지. 부끄러움이 얼굴을 물들였지만 슬쩍 둘러보니 내가 제일 막내인 듯하다. 수강생들의 연령대가 꽤 높아 '얼마 만에 하는 자기소개인지'란 생각이 쏙 들어가더라는.


인생선배의 이야기를 듣듯 그들의 소개에 귀를 기울였다. 캘리그라피를 하다 보니 좋은 글도 함께 적고 싶어 배우러 왔고, 그 재미를 엄마에게도 알려주려 70대 엄마를 모시고 온다는 딸. 공무원 정년퇴직을 하고 몇 년 전 쓰러지는 바람에 재활치료 중이지만 아내의 도움을 받아 함께 오는 아저씨. 퇴직 후 계속 쓰는 삶을 살고 계시단다. 뭐 하러 그런 수업을 가냐고 엄마에게 핀잔도 들었다는 51세 청년 직장인. 미혼이라 엄마의 잔소리가 여전하시다고. 듣다 보니 사연도 사람도 다양하다. 저마다의 이유로 동시수업을 들으러 왔지만 모두들 책과 글을 곁에 두어서인지 생기 넘치고 우아하다. 학인 중엔 지역 문학상 수상자, 시 문예 당선자들도 있으니 함께 있으면 좋은 기운이 절로 느껴진다.




작년 아이 학교에서 진행한 그림책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알게 된 엄마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휴직했던 엄마들은 올봄 복직을 했고, 다른 엄마들도 대부분 일을 하기 시작했다. 경력을 살린 재취업, 영어강사, 방과 후 코딩강사, 단기알바 등 이제 아이들이 3~4학년쯤 되니 저마다 일자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난 그때, 주부들이 이제 다른 일 좀 시작해 볼까 하는 시기에 딱 박차고 나온 거였구나.. 다들 직업찾기에 여념이 없는 시간에 어느 강의실에 앉아 동시를 배우고 있는 거구나. 속없이.. 잘하고 있는 짓일까? 생각에 빠진다.


40대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지 무슨 동시수업인가 스스로도 갸우뚱했다. 주변 엄마들이 자신의 경력을 다시 만들어 갈 때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뭘 하려고 직장을 그만둔 게 아니라 뭘 안 하려고 그만둔 거라 호기롭게 얘기했지만 이따금 불안했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지.


그때마다 찾아보는 영상에서는 100세 시대에 40대는 절반도 살지 않은 청년이란다. 다들 열심히 살라고만 한다. 대충 살지 말라고, 멈추지 말라고, 계속 무언가를 하란다. 자기 계발을 하고, 성장을 하라고 응원 같은 채찍질을 날린다. 자기 계발을 좋아하는 나지만 동기부여 영상을 (많이)보고 있자면 살짝 더부룩해진다. 조금 뒹굴거릴 수도 있고, 천천히 쉬어 갈 수도 있지 않나? 쳇!


일주일에 딱 두 시간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고 속없이 살아보겠다. 어린아이 마음으로 돌아가 동시를 읽고 쓰고 배우며 더부룩한 마음을 달래보련다.




덧. 낄낄낄 웃음이 나는 동시를 소개해 본다.

동시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이런 재미있는 동시는 모르고 살았겠지^^


 <눈치 없는 부처님께 꼭 하고 싶은 말>  

                                          - 정연철-

아, 진짜!
월, 화, 수, 목, 금
그 많은 날들 놔두고
왜 하필 노는 날에 오시는 거예요?
막 화나려고 해요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다음부턴 꼭
학교 가는 날에 와 주세요
불쌍한 어린이들의 소원 모른 체하기 없기예요
이건 비밀인데요
우리 선생님도 불만 많은 눈치였어요

아, 참!
말 나온 김에 예수님께도 부탁드립니다






작가의 이전글 팔은 안으로 굽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