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붙들고 있는 시간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있는 시간보다 긴 오늘날, 사람과 사람의 관계만큼 사람과 사물 간의 관계도 깊어졌다. 그 깊어진 관계는 반려기기라는 용어로 설명된다. 반려기기란 사람들이 기계를 사용하고 조작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기계에 심적으로 의지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정유라,『말의 트렌드』, 인플루엔셜, 2022, p.121
독서모임에서 읽은 <말의 트렌드>에서 반려기기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관계를 맺는 대상이 점점 다양해지면서 이제 '반려'라는 언어가 동물을 넘어 다양한 대상과 인간관계의 관계를 설명할 때 사용된다고 하더군요.
저는 반려식물까지는 들어본 적 있지만 반려기기는 참 낯설었어요. ‘내가 사물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더구나 그 관계가 깊어졌다고?' 의아했죠. 우리 집 반려동물 크림이만큼 애정을 듬뿍 쏟고 있는 반려기기가 과연 내게도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제가 주부이다 보니 처음에는 건조기, 로봇청소기가 떠오르더군요. 이 두 친구도 최선을 다해 저를 도와주고 있는 존재니까요. 이들이 없었다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저만의 시간이 턱없이 줄어들었을 거예요. 아주 아끼는 녀석들입니다. 하지만 저의 반려기기라 칭하긴 어딘가 부족해 보입니다. 책에서 반려란 '늘 내 곁에서 함께하는 친밀한 사이'이며, 반려기기는 그 기계에 '심적으로 의지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했거든요. 건조기와 로봇청소기가 제 몸을 편안하게 해 주긴 하나 심적인 안정감까지는 주지 않았고, 또 저와 늘 함께 다닐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니 말이죠. 오히려 이들의 필터를 관리하고 내부를 청소하는 일이 마음에 부담이 되기도 한답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든 저와 함께 할 수 있고, 심적으로 의지가 되는 반려기기가 있을까요?
다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있습니다! 바로 작고 귀여운 '에어팟'
저는 해야 하지만 꾀가 나는 일 주로 집안일을 할 때 에어팟을 귀에 꽂습니다. 식사준비, 설거지, 냉장고 청소 등 가짓수는 헤아릴 수 없죠. 좋아하는 팟캐스트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이야기를 들으며 집안일을 하다 보면 하기 싫은 일도 그럭저럭 해냅니다. 산책을 하거나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에어팟과 함께 해요. 교육 유튜브나 오디오북을 듣기도 하고, 머리가 복잡할 땐 그냥 음악을 듣습니다. '머리 복잡할 때 듣는 노래' '아무 생각 없이 듣기 좋은 팝송' 뭐 이런 걸 검색해서요. 참!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명상을 듣기 위해 침대에 누운 채로 에어팟을 찾기도 하네요. 늘 제 곁에서 함께하는 친밀한 에어팟. 저의 반려기기가 확실합니다. 하하
몇 달 전 아이가 수학여행 가면서 제 에어팟을 빌려간 적이 있는데 그때 이 녀석이 얼마나 그립던지요. 심적으로 의지를 많이 하고 있었나 봅니다.
건조기나 로봇청소기 같이 손 갈 일도 없는 에어팟. 침대 머리맡, 주머니 속, 가방 안 어디든 필요한 곳에 옮겨 두고 친하게 지내렵니다.
처음엔 낯설던 반려기기라는 단어가 이제는 어쩐지 사랑스럽습니다. 반려기기라 이름 지어주니 그냥 에어팟에서 나만의 에어팟이 되었네요. 마치 그의 이름을 불러주니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꽃> 처럼요. 역시 이름을 부르며 애정을 쏟으면 특별해지나 봅니다. 글쓰기에도 더 애정을 쏟아봐야겠어요.
다른 분들의 반려기기는 무엇일지 문득 궁금해지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