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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날 Jul 10. 2023

태풍과 함께 사라진 나무

아내 말을 듣지 않으면 생기는 일

2019년 9월. 태풍 ‘링링’이 한반도 전역을 강타하며 기록적인 강풍을 몰고 왔다. 사망자도 발생하고 시설물 피해건수도 몇 천 건에 이르렀던 강한 태풍이었다.


9살이던 아이는 그해 봄부터 플룻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직장생활을 했던지라 어쩔 수 없이 토요일 수업을 들으며 학원을 오가는 일은 내가 맡아했다. 링링이 들이닥치던 그날은 남편이 쉬는 토요일이라 남편차로 함께 이동했다. 안전염려증이 있는 나는 오전부터 심상치 않게 불던 바람 탓에 10여분 남짓한 거리에도 얼마나 마음이 불안하던지. 수업에 늦을지 몰라 딸아이와 나는 학원 앞에서 먼저 내리고 남편은 주차를 하고 오기로 했다. 번화가라 평소 도로변에 주차하는 차량이 많은 장소이긴 하나 바람이 꽤 부니 주차장에 차를 두라는 당부를 나는 잊지 않았다.


뒤늦게 학원으로 들어온 남편은 낮은 목소리로 비밀을 알려주듯 내게 말했다.


"밖에 바람 진짜 많이 불어. 주차하는데 옆에 있는 나무가 흔들흔들하더라니깐."


역시 내 남편이다. 건물 안 주차장에 세우라는 아내의 당부를 시원하게 무시하고 길가에 주차를 하고 왔으니 말이다.




딸아이의 40분 레슨이 끝났다. 오피스텔 2층에 자리 잡은 학원은 출입문을 열면 바로 외부와 연결되고, 그 앞에 부채꼴 모양으로 확 펼쳐진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가는 구조다. 그날도 똑같은 동선으로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기 전 별생각 없이 아래를 보고 있었는데..


“아이C”


갑자기 남편이 험한 말을 남긴 채 계단을 전속력으로 뛰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왜 저래’를 속으로 읊조리며 딸의 손을 잡고 뒤따라 내려가다 마주한 참혹한 광경.



태풍에 쓰러진 나무. 현장에서 보면 훨씬 크다ㅠ



맞다. 나무에 깔린 저 차는 우리 집 차다. 장거리 출근을 하는 남편과 캠핑이다 뭐다 주말마다 여행이 잦았던 우리 가족을 위해 기꺼이 최선을 다해왔던 까만 에쓰엠파이브.


부러진 나무는 한쪽 도로를 모두 막아 교통을 마비시켰고 우리 차는 어느새 인싸가 되어 행인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당사자인 우리 가족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어떤 사람은 사건현장을 배경으로 환하게 셀카도 찍더라는. 에잇!


시에서 관리하는 가로수 이므로 구청 당직실에 신고를 했고, 좀 있으니 어찌 알았는지 경찰도 출동해 교통정리를 해주었으며 보험사 직원도 속속 도착했다. 그런 와중에 얄궂게도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나는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편아. 도대체 몇 사람을 고생시키는 거니.


건물 안에 주차하라는 내 말을 듣지 않아 이 사달이 났고 덕분에 주말 외출 계획은 틀어졌다. 보험사에선 나중에 시에다 구상권을 청구해 보라 하나 이도 어찌 될지 확신할 수 없으니 다음 해 보험료도 오르게 생겼다. 한숨이 나왔다. 남편은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다 아이에게 괜히 너스레를 떤다.


우와~ 천만다행 아니냐? 아빠가 차에 타고 있을 때 나무 쓰러졌다고 생각해 봐라. 진짜 다행이지 않니?

 

주차할 때 나무가 흔들거리더라 비밀스럽게 전했던 말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라고 싹 바꾸더라는. 부러질 줄 몰랐다나? 에라잇!




플룻수업을 들으러 가던 어느 날 부러진 나무가 제거된 자리에 작은 묘목이 심어진 걸 발견했다. 딸아이는 그 나무에게 '태풍'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학원을 오갈 때마다 잘 자라라고 인사해 주었다. 2년 전 다른 도시로 이사 오면서 이제 더 이상 태풍이는 만날 수 없지만 장마철 바람이 거세질 때면 태풍이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부러진 나무의 안위도 이제야 걱정이 된다는. 그 나무는 어찌 되었을까.

올여름은 장마와 태풍피해 없이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라본다. 사람도 나무도 농작물도 길고양이도 모두 잘 견디길.



덧. 남편은 여전히 아내의 말을 간헐적으로 듣는다. 역시 내 남편이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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