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장선우(글) 장서윤(그림)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날밤 우리는 배를 타고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졸업과 여행을 앞두고 우리 가족은 이런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리조트 조식 신청하면 초등학생은 무료라는데, ㅇㅇ이는 졸업하니까 이제 초등학생이 아닌 건가?"
"제주도에서 ㅇㅇ이가 가자던 전시관은 초등학생 요금이 따로 있던데, ㅇㅇ이 초등학생 요금 내도 되나?"
하필 졸업식날 여행을 떠나니 이 아이가 초등학생인 것인지 중학생인 것인지,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배편 예약을 할 때부터 갈팡질팡하던 남편은 경비 절약을 위해 '어찌 됐건 초등학생이다' 결정했고, 여차하면 12살이라 얘기하자는 농담을 던졌다.(만으로 12살이 맞긴 하다) 나는 학교 밖 아이들도 많은 세상에 기준을 나이로 통일해야지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이렇게 나눠놓는 게 말이 되냐며 열을 뿜었다. 그 와중에 아이도 껴든다. 자기 신분은 이제 백수인 거냐고.(하하)
아이는 변한 게 없는데 졸업식을 기점으로 어제는 초등학생, 오늘은 초등학생이 아닌 걸까. 어제는 어린이, 오늘은 청소년이 되는 건가? 지우개 자르듯 이제 너는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니 청소년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어린애 같은 모습은 이제 그만 보이거라 가르쳐야 하나.
이번 겨울방학엔 뷔페를 많이 가자며, 초등요금을 실컷 누리자 우스갯소리를 하던 나는 머릿속이 뒤섞였다.
경계에 서서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그림책을 만났다. 장선우, 장서윤 작가의 그림책 <경계선>
그림책 속 그녀는 20대에서 이제 막 30대가 되는 경계에 서 있다. 30대가 되기 전에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인지 묻는다. 모두 학생이었지만 이제는 미혼인 나와 결혼할 친구, 결혼한 친구, 아이가 있는 친구로 모두 달라졌다고 말한다. 서른 살에 혼자 살면 자취일까 독립일까. 스무 살이면 자취, 서른 살이면 독립인건지 그녀는 생각한다. 나이, 사는 지역, 친구, 취향, 시간, 계절, 인간관계. 분명하게 나뉘지 않는 경계에 서서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다.
16년 직장생활을 끝낸 나는 워킹맘에서 전업주부가 되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집안일을 하는데 살림은 일(work)이 아닌 것인지. 나를 규정짓던 워킹맘에서 워킹이 빠져나갔다. 나는 이제 일하지 않는 엄마다. 그렇다면 날마다 하는 가사(家事)는 일이 아니고 무엇일까?
매일 가정을 살피지만 아이가 큰 요즘은 웬만한 건 눈감고 나를 돌보는 일에 더 힘쓰며 산다. 주부역할에 전념하지 않는 나는 과연 전업주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살림이 서툴고 전문적이지 않으니 부업주부쯤이라 해둬야 할까.
인터넷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거나 프로그램 신청서를 작성할 때 직업 체크하는 난을 이따금 만난다. 일을 그만둔 직후엔 빈칸 앞에서 종종 머뭇거렸다. 주부와 무직사이에서. 사람들은 살림하는 엄마들을 전업주부라며 마치 주부가 직업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주부는 직업도 직함도 아니기에 '주부'에 체크하는 것이 개운치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 하고 마냥 노는 것도 아닌데, 집안 구석구석내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건만. '무직’은 너무하다 싶어 기어이 ‘기타’에 체크하곤 했다. 금세 공허함도 뒤따라왔다.
나라는 존재는 그대로인데 '일하는 엄마'와 '일하지 않는 엄마'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시기를 지났다.
이제 120세 시대라는 말까지 나오는 판에 남은 인생 나는 누구로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고심하는 시간이 느는 요즘, 생각하게 만드는 그림책이었다. 무 자르듯 딱 반으로 갈라 나는 이런 사람, 그러니 이 일만 해야지라고 규정짓진 말아야지. 전업주부라고 주부일만 하지 말고, 워킹맘이라고 일만 하지 말고.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지.
지난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었던 <공감의 반경>이라는 책도 생각났다. 누구나 이쪽이 될 수도 그 너머 저쪽이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 그러니 공감의 반경을 넓혀야 한다는 메시지. 경계는 조화롭고 나는 어디에도 속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경계선>의 메시지와도 닿아있단 생각에 떠올랐나 보다.
초등맘에서 중등맘이 되는 나. 위킹맘에서 전업주부를 거쳐 또 다른 나를 꿈꾸는 나. 경계에서 서성이며 '나'를 찾아 헤매는 어른들이 가볍게 때론 진지하게 읽어보면 좋을 그림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