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도 설명서가 있다면
영양제를 먹다가 손이 심심했는지 겉면에 적힌 설명서를 읽었다. 약을 보관하는 방법과 복용 방법, 주의사항 등이 몇 줄씩 나열되어 있었다.
사람에게도 설명서가 있으면 어떨까. 내가 기분이 나쁘거나 남이 힘들 때 나는 그 이유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고, 어떤 방식을 어떤 온도로 조절하면 기분이 나아질 수 있는지, 나는 모든 것을 명확하게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엔 내가 남을 화나게 한 순간을 탁월하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네 화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 너의 괴로움은 이렇게 저렇게 하면 없어질 거야. 네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왜. 난 저번에도 널 그렇게 대했는데. 그건 네가 너를 몰라서 그래. 뭐긴, 네 설명서가 그래. 그런 걸 어쩌라고.
처음엔 편할 것이다. 저 사람과 부딪히지 않아도 그의 호와 불호를 알 수 있고 나의 영역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와의 적절한 거리를 지키며 '좋은 사람'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 저 사람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머리 위에 동동 떠다니는 설명서를 보면, 사람을 완벽하게 판단할 수도 있다. 얼마나 좋은가. 손대지 않고 코푸는 격이 바로 이런 것이니.
그러나, 이런 것이 삶에 필수적일까. 이런 '사람 설명서'에 빠져 우리는 그곳에 적혀있지 않은 일들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지나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각각의 설명서에 전적으로 기초해 상대방과 심지어는 스스로를 알아갈 순간을 무시하며 ‘더 중요한 것’에 몰두하자고 할 테지. 말미에는 그런 데 시간 쏟지 말자고 외칠 것이다. 나를 알아가고 남을 알아가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저 구석으로 미뤄둘 것이다.
그래도 좋을까, 인생은.
그렇게까지 쉽고 간단하게 사는 것.
노력하지 않은 이해를 진정한 이해라고 여기는 것.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순간을 무시해도 우리의 삶은 괜찮을까. 더 가치 있는 일? 다른 일을 무시하며 행하는 그것이 과연 가치 있는 행위일까? 우리는 자꾸만 편리를 좇으며 더 나은 일에 몰두하자고 하지만, 나는 그런 일 모두 사람을 이해하는 것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 시간을 쏟는 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일 아닐까. 사람에게 말을 걸고 취향을 알고 나의 신념을 알리고 서로의 눈물과 웃음에 물드는 일이 정말 가치 없는 일인가.
지금 이 글을 읽는 모두, 말해보라. 이제까지 우리가 힘 쏟고 아파하며 행복해하던 일을 지울 수 있는가.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설명서 따위 필요하지 않다. 적어도 나는 필요 없다. 경험하지 않고 쉽게 얻는 어떤 정보들은 알코올보다 더 쉽게, 가볍게 증발해버리므로. 가치가 없다면 차라리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런 일을 빠르게 처리하면서까지 행해야 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인데.
영양제에겐 언제나 설명서와 주의사항이 필요하다. 대신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는 서로에게, 스스로에게 부딪히며 사람을 알아가야겠지. 그게 인간적인 일 아닐까. 부딪히며 깨달은 일들을 마음에 새기며 사는 것이, 그런 것을 가치라고 여기며 사는 것이 인간 아니겠나.
나는 언제까지고 인간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