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는 즐거움
23.
필사를 시작했다. 한 권의 책을 완독 하면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하던 나의 독서 생활에 새로움을 추가해보았다.
나는 책을 읽으면 연필을 사용해 문장에 줄을 치고 인덱스를 붙인다. 또는 책 모서리를 접어 표시를 해 둔다. 나중에 그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좋았던 기억만 모아서 읽을 수 있도록 그렇게 표시를 했다.
그렇게 적지 않고 읽기만 했다. 새로운 이야기를 뇌 속으로 흘려보내고 희미해지면 희미해지는 대로 놔뒀다. 나는 휴식의 개념으로 독서를 했고 머릿속에 남은 이야기는 매우 빈약했다. 영화표의 잉크가 증발하듯이 내 기억도, 감상도, 한 문장에 갇혀 박찬 마음을 숨기지 않았던 순간들도 공중으로 흩어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필사를 시작했다. 책 한 권을 읽고 좋았던 문장에 줄을 치고 인덱스를 붙이고, 마지막으로 필사를 했다. 검은색 가름 끈을 품은 검은색 노트가 나의 본격적인 필사 노트가 되었다. 첫 타자는 마를렌 하우스호퍼의 『벽』이었다. 세상에 홀로 남은 여성의 생존 일기. 그 속에서 나는 주인공에게 동화되어 이틀 동안 책 속에 빠져 지냈다. 모든 이야기는 독백으로 시작해 독백으로 마무리되는 형식이었다. 공감되는 문장과 마음이 저릿한 문장이 곳곳에 박혀있었다. 읽으면서 줄을 긋고 남아있던 인덱스를 다 써 버렸다.
감정이 온전히 가시기 전에 필사를 하고 싶었다. 노트를 펼쳐 첫 장에 문장을 옮겨 적었다. 몇 페이지의 어떤 문장, 한 줄 띄고 다시 몇 페이지의 어떤 문장. 그런 공식으로 책 한 권을 압축했다. 압도적으로 좋은 문장은 옮겨 적고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손으로 훑고 입으로 따라 말했다. 나의 문장이 될 순 없지만 나의 문장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꾸 읊었다. 내가 느낀 감정이 그 문장에 묻어서,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다시 벅차오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문장을 읊었다.
내가 쓰지 않는 단어를 쓰는 작가가 좋다.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른 구석을 창조하는 이야기가 좋다. 그런 글을 읽으면 내가 쓸 수 있는 단어가 늘어나는 느낌이다. 저 사람의 좋은 이야기를 제대로 흡수해서 나의 세계를 확장해야지. 그런 생각을 한다.
필사를 한다. 책을 읽고 남는 것은 나의 감정과 그 이후의 삶이다. 쓰지 않으면 나의 머리와 손은 굳을 것이고 굳기 전에, 말랑말랑한 감정이 피어오를 때 그것을 노트에 박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받아 적고, 눈으로 손으로 입으로 훑어야 독서가 끝난다는 생각이 든다. 더 나은 길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