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한 마디면 되잖아
29.
어떤 말은 때로 무기가 되곤 한다. 날 뭉개거나 찌르면서 죽인다. 제대로 된 사과, 그것만이 이 상황을 무마시킬 수 있는데 나를 무시한 사람이 그런 것을 할 리가.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나에게 상처 입히지 않았겠지. 그런 생각으로 나는 몇 사람을 떠나보냈다.
솔직히 말하겠다. 대부분의 관계는 내가 무서워서 떠났다. 상대방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은 내가 그와 함께 한 모든 시절을 털어버리고 일어났다. 저런 쓰레기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사람이라면 정말 화났을 때 날 죽이려고 달려들지도 몰라. 잔뜩 긴장한 채로 긴장하지 않은 척하며 관계를 끊는다. 다만 상대방은 모르게 서서히 그리고 고요하게.
왜 사람들은 미안해하지 않을까.
그 인간, 적어도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얼마나 더 엎드려야 해? 엎드려 절 받는 것도 정도가 있지, 모욕적이고 불쾌해. 머릿속에서 각기 다른 분노가 뒤엉켰다. 화가 나는데 무섭고 두렵다. 혹시나 내게 해코지를 하면 어떡하지? 천둥번개처럼 찢어질 듯 소리치면서 나에게 주목하고 달려들면 어떡해? 무서워. 피하고 싶다. 현명이고 나발이고 나는 여기서 도망쳐야겠다.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미안하다 한 마디면 되잖아.
그랬구나. 미안해. 그런 줄 몰랐어. 정말, 정말 미안해. 그 말이 어려워서 비겁하게 화를 내는 사람들아. 나약함을 감추려고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들아. 너희는 우리에게 미안해야 한다. 나에게 소리치고 내 존재를 무시하고 경멸의 눈을 보이던 사람아, 나는 당신의 인질이 아니다.
미안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좋은 것을 보여 주는 사람보다 싫은 것을 ‘싫은 것’으로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을 보고 싶다. 제대로 된 사과를 보고 싶다. 등 떠밀려서 하는 말이 아닌, 오로지 자신이 편하고자 뱉는 껍데기 같은 말이 아닌, 억울한 척하며 나를 가해자로 몰아가서 기어이 내가 고개 숙이게 만드는 사람이 아닌, 제대로 된 인간의 제대로 된 말을 듣고 싶다.
내가 많은 걸 바라니.
정확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자란 어른은 스스로를 뭉개며 암울한 시절을 보내는 것 같다. 타인의 목소리에 묻혀 자신의 목소리는 듣지 못하고, 속마음을 감추고, 최소한의 실속으로 타인과 대화를 한다. 도망치면서 점점 삶의 반경을 줄인다. 홀로 서 있는 공간만이 유일한 안식처가 되고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을 때쯤 스스로를 갉아먹어 허기진 마음을 확인한다.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