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긴 글 #67 - 제가 더위를 많이 타서요

여름과 싸워서 이긴 적이 없다

by 생강

67.


반팔을 꺼냈다. 여름 잠옷을 살 것이다. 전기장판을 뺐다. 밤에는 여전히 추워서 비가 오는 날이면 장판을 켜놓고 잤는데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더위의 시작이다. 봄과 여름 사이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너는 어릴 때부터 더위를 많이 탔지.

아기와 아이 그 어딘가의 나이였을 무렵, 나는 친척 집에 놀러 갈 때마다 더워서 울곤 했다. 방충망으로 닫은 창문 쪽을 보고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운다. 엄마는 내가 귀신을 보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나는 정신없이 울어재꼈고 아무리 달래도 달래지지 않았으며 눈동자가 곧 넘어갈 것처럼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더울 때마다 악몽을 꾼 것 같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아이들이 갖고 놀기엔 꽤나 무섭게 생긴 도깨비 인형이 꿈에 자주 나온 것. 더위 속에서 눈을 감으면 도깨비가 여고괴담에 나오는 귀신처럼 점점 크게 다가오는 장면이 선명했다.

목이 쉴 정도로 울고 나면 엄마가 나를 붙들고 괜찮다고 달래는 장면으로 돌아온다. 온 집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장면, 걱정하는 눈빛들, 늘어진 몸, 바깥은 오토바이 소리와 매미 소리가 가득하다. 나는 더위와 싸워서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작년엔 두 달 동안 비만 왔는데 올해는 정말 더울 것 같아.


심호흡 하자. 올여름은 또 어떻게 견딜 것인가. 고민해 봐도 답은 없다. 추우면 껴입기라도 할 텐데 더울 땐 더 벗을 수가 없어 고통스럽다. 선풍기와 얼음주머니와 그늘 중에 단 하나라도 없는 곳은 가기 힘들다. 그 와중에 에어컨 바람은 싫다. 머리가 아프고 가끔은 헛구역질이 난다. 까다로운 몸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싶다가도 요즘은 휴대용 선풍기에 의지하자고 생각한다.


그래도, 여름이 있으니 겨울이 있는 것 아니겠어.


더위를 느낄 수 있어서 추위도 느낄 수 있는 거지. 마치 불행을 느끼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어떻게 다 내 마음대로 될 수 있겠어. 여름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 걸. 사실 나도 여름밤은 좋아. 여름을 사랑하는 친구 덕분에 여름밤의 매력을 알았지. 끈적이지만 종종 시원한 바람이 불고 매미도 지치는지 간헐적으로 우는 밤. 그럴 때면 여름도 살만 하구나 싶어.


나는 더위와 싸워서 이긴 적 없어.

싸우지 않고 같은 편에 서 있으면 안 될까.


나는 더 이상 더워서 우는 아이가 아니고 나름대로 여름을 견디는 어른이 되었는데, 여름은 내 편에 서 있을 생각이 없는지 자꾸만 길어진다. 나는 여름이 하나도 그립지 않아서 겨울에도 겨울만을 사랑하고 늦봄부터 여름을 단단히 준비한다. 그래도 여름은 항상 날 이긴다. 평생 지는 게임이라면 여름과 같은 편이 되면 안 될까. 불행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결국 같은 편에 서기로 다짐했는데 여름아, 어떻게 안 될까.

겨울을 사랑하는 건 상대적으로 여름이 싫어서다. 행복을 사랑하는 건 불행이 싫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을 느끼는 나에 취해 밤을 새울 때면 불행도 절망도 애틋해진다. 여름밤이 그러하듯이.


뭐든 하나를 느끼면 그에 반대되는 것을 느끼기 마련이다. 결국 그중에 하나만을 가지는 건 불가능하고 하나를 갖고 싶다면 다른 하나도 가져야 하는 운명이다. 그게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두 가지를 쥐고 얼마나 현명하게 살 것인가, 는 나의 숙제다. 여름과 겨울을 피할 수 없듯이 불행과 행복을 잘 구워삶아야 한다.


계절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인터스텔라를 보고 먼지처럼 작아진 나라는 존재에 회의감을 느끼던 그 시절처럼 자연 앞에 너무 작은 인간이 된다.


올해도 여름과 싸울 예정인데 아마 내가 질 것이다. 싸운다기보단 일방적인 패배에 가깝다. 나는 같은 편이고 싶어도 평생 불가능하다. 내가 얼마나 더위를 잘 견딜 것인지가 관전 포인트다. 수박과 콩국수, 우뭇가사리, 아이스커피가 나를 도와줄 것이다. 그래도 질 것이다. 그래도 견딘다. 결국 가을이 오고 겨울이 와서 여름밤의 온도를 떠올리고 있을 테니까.


올여름은 덜 덥고 덜 불행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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