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을 흠뻑 좋아하는 삶
74.
피아노를 거실로 옮겼다. 이사를 온 뒤로 피아노는 언제나 내 방에 있었다.
악보는 그대로고 조율은 안 했다. 몇 년 전까지는 열심히 쳤다. 열심히,라고 할 것도 없이 손 가는 대로 쳤다.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흡사 게임 속의 노래처럼 통통 튀는 노래를 자주 쳤고, 종종 영화 음악도 쳤다. 연주라고 하기엔 놀이였고 놀이라고 하기엔 연주였다. 몇 년이 지나고 피아노 위에 안 쓰는 물건을 올려놓은 뒤로 한 번도 피아노를 친 적이 없다. 방에 새로운 가구를 들이고 싶어서 부모님과 피아노를 거실로 옮겼다. 대부분 두 분이서 하셨으므로 나는 재롱과 잔심부름을 맡았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는 습성이 강하다는 것을, 피아노를 연주할 때마다 체감했다. 장조의 음악보다는 단조를 사랑하고 매번 치던 악보를 치고 그중에서도 가장 전율이 돋는 부분만 반복적으로 친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기분을 흠뻑 느끼고 싶다. 피아노를 잘 치는 것도 음대를 나온 것도 아니라서 나는 엉성하지만 철저하게 흥미 위주로 피아노를 친다.
어릴 때 언니가 피아노를 배운다는 말을 듣고 무조건 나도 배우고 싶다고 한 게 시작이었다.
좋은 것만 치면 안 돼?
응, 안 돼.
학원 안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한 평 남짓한 방에 피아노와 나뿐인 광경은 지금 생각해도 숨이 막힌다. 갇힌 곳에 오래 못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항상 숨이 막혔다. 포도알을 다 채우지 못하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집에 가지 못하는 시스템이었다. 종종 연습을 다 했음에도 호통을 치며 보내주지 않을 때가 있었다. 선생님은 무서웠고 피아노도 무서웠다. 때로는 건반이 괴물이 이빨처럼 보였다.
그 뒤로 나는 다른 선생님이 집으로 방문하는 시스템 속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꽤 오래 배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5년에서 6년까지의 시간 동안 피아노를 치고 싶은 마음보다 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게 지겹고 좋아하는 곡을 칠 수 없다는 게 화가 났다. 실력이 바닥이라 칠 수 없는 데도 화가 났고 연습을 해도 실력이 안 늘어서 화가 났다. 피하고 피해도 결국 손은 건반 위로 올린다. 그런 방식으로 피아노를 마주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걸 그맘때쯤 가장 자주 들었다. 선생님을 비롯한 주위 어른들은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면 기타를 배우게 해 주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피아노에서 기타로 관심을 옮기던 시기였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피아노에서 기타로 옮긴 과정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피아노를 배운 것이 쓸모 있어서 음을 읽고 혼자 기타 코드를 따서 선생님이 알려주지 않은 노래를 열심히 연주했다는 것. 코드를 따다가 막히면 선생님에게 이 노래가 배우고 싶다며 제안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 열정은 피아노를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몰랐다면 모르는 채로 지나갔을 일이다.
그때는, 내가 음대를 갈 줄 알았어.
단소를 배울 땐 국악을 전공하자던 선생님이 있었고 엄마를 따라서 하모니카를 배울 땐 내게 미니어처 하모니카를 선물로 준 선생님이 있었고 피아노를 배울 땐 피아노를 애정하고 증오하면서도 사랑하는 악보를 간직했고 기타를 배울 땐 학교에서 기타로 수행평가를 보고 친구들 앞에서 연주했던 생생한 떨림이 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아주 잠시 가수를 꿈꾸기도 했다. 연주는 가능한데 목소리가 별로였다. 기타로 유명한 곡을 치면서 노래까지 불러야 수행평가로 인정해준다던 음악 선생님을 미워하면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습하던 내가 있었다. 노래가 끝난 뒤 친구들의 박수 소리와 내 심장 소리를 잊지 못한다. 가수들은 이런 떨림이 좋아서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하고 공연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깊이 한다. 그때 나는 일 년 후면 수능을 봐야 하는 학생이었으므로 가수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사운드 클라우드에 노래 한 곡 정도는 올릴 텐데. 그때 나는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밋밋한 사람이었다.
거실에 나온 피아노를 본다. 먼지를 닦고 악보를 정리하니 꽤 근사한 모양새다. 몇 년 만에 피아노 의자를 꺼내 앉는다. 페달은 낡았고 조율은 엉망이며 건반 중 ‘솔’ 하나가 꽉 막힌 소리를 낸다. 매번 연주하던, 게임 속 노래 같던 것을 연주한다. 쉬워서 외워둔 것인데 여전히 손이 기억한다. 들뜬 마음에 영화 음악 악보를 꺼내 영화인 줄도 몰랐던 제목의 노래들을 연주한다. 더듬더듬 음계를 읽고 박자를 맞춘다. 오늘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친다. 좋은 것만 좋아해도 시간을 짧다. 언제 다시 싫증 날지도 모르니 좋을 때 즐겨야 한다. 지금은 일단 좋은 것을 오랫동안 좋아하는, 그래서 들뜬 사람이다.
방에 들어와서 기타를 꺼낸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동영상 하나에 의지하며 코드를 따고 입에 피크를 물고 손가락을 튕기며 연주하던 나를 생각한다. 곡 이름은 황혼이고 여전히 악보는 없다. 나의 손가락만 코드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기분 좋게 연주를 하다가 비가 올 것 같아 창문을 닫는다. 침대 위에 기타를 올려두고 거실에 놓인 피아노를 본다. 언젠가 음악으로 먹고 살 줄 알았던 아이는 글을 쓰지만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악기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것을 진하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피아노 덮개를 닫고 의자를 밀어 넣는다. 기타 조율을 마치고 검은 케이스에 기타를 넣고 지퍼로 닫는다. 눈을 깊게 감았다가 가볍게 뜨고,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타협을 할 때마다 납작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사랑할 땐 풍성하게 사랑한다. 두 배, 세 배로 사랑하면 덜 납작해질 수 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랑 같아도 자세히 보면 내 사랑이 나를 채우고 있다. 좋아하는 것을 흠뻑 좋아하는 삶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