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긴 글 #75 - 여섯 시 반에 예약했는데요

충동적으로 미용실에 갔다

by 생강

75.


머리를 잘랐다. 이제 내게 남은 파마머리는 없다. 충동적으로 미용실을 예약하고 대충 잡히는 옷을 입고 나갔다. 언니의 추천으로 간 곳이었는데 입구를 찾느라 헤맸다. 분명 저 위에 미용실이 보이는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계단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돌다 저 멀리 계단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곧장 그 길로 올라갔다.


몇 시 예약이세요?

여섯 시 반이요.

찾으시는 선생님 있으세요?


지난번, 언니의 머리를 잘라 준 선생님을 골라 예약했다. 친절하고 실력이 좋은 선생님이어서 언니는 머리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예약 시간과 선생님의 이름을 말하고 잠시 대기했다. 집에서 튕겨져 나오듯 충동적으로 온 것을 생각하며 숨을 고른다. 자리를 안내하고 머리를 감겨주는 보조 선생님과 예약한 디자이너 선생님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어떤 머리를 하냐는 질문에 여러 사진을 보여 줄 예정이었다. 선생님은 단 한 번의 눈길로 사진을 훑었고 알겠다는 듯 보조 선생님에게 나를 넘겼다.


보조 선생님은 하얀 셔츠에 까만 앞치마를 하고 무전기를 차고 있었다. 어떻게 왔냐는 질문에 언니의 추천으로 왔다고 말하니 벅찬 얼굴로 감사하다고 말한다. 물의 온도를 묻고 샴푸를 하는 동안 두피 마사지도 한다. 흔히 말하는 스몰 토크에 자신이 없던 나는 선생님의 질문에 홀린 듯 대답했다.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말투로 나의 긴장을 달래준다. 파마를 한 지 일 년이 돼서 이젠 남은 머리를 자르고 싶다고 말하니 여름이라 아주 시원하게 자르는 것도 좋다며 공감해준다. 선생님은 본인의 머리 상태를 읊으며 어떨 때 좋고 어떨 때 힘들다고 말한다. 여기 미용실 건물이 창이 커서 날이 좋으면 저 멀리 산도 보인다고 말한다. 슬쩍 보니 정말 산이 보인다. 기분 좋게 머리를 하고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고 젖은 내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다시 자리로 안내해준다. 처음 보는 사람과 이렇게 통통 튀는 대화를 한 적이 있나. 생각을 하면서 아무래도 나는 사람의 친절에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디자이너 선생님에게 언니의 머리를 잘 잘라줘서 선생님을 콕 집어 예약했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가위질을 하다가 놀란 눈으로 언니의 외향을 물었고 설명했으나 기억이 나질 안는 듯했다. 민망하고 고마운 얼굴이다. 그 뒤로 우리는 간간히 대화를 하며 잘려 나가는 머리를 본다. 잠시 졸다가 왼쪽 귀에 무언가 툭툭 걸리는 느낌이 난다. 빗이 피어싱을 건드려서 나는 소리다. 선생님은 이게 뭔가, 싶어 머리를 들춰보고 정말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를 한다. 뚫은 지 오래되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증명하려고 나는 귀를 이리저리 움직인다. 미용실을 갈 때마다 있는 일이라 괜찮다고 말한다. 우리는 민망하고 재밌다는 듯 웃는다.


잔머리를 정리하고 젖은 머리를 말린다. 보조 선생님이 머리를 말려준다. 보자마자 두상이 예뻐서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두상이 예뻐서 기분이 좋은 날이라니. 내 몸에게 감사하다. 선생님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말린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람이 머리칼을 스칠 때 통 유리창에 노을이 진다. 산이 보인다던 쪽으로 사람들이 고개를 돌린다. 슬쩍 보니 아름답고 노곤한 풍경이다. 꽤 괜찮은 미용실을 찾은 것 같다. 선생님은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라며 더 정성스레 머리를 만져준다.


보조 선생님과 디자이너 선생님의 친절과 실력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서 예약한 사이트로 후기를 쓰겠다고 말한다. 선생님은 예상하지 못한 얼굴로 고맙다고 말한다. 나 또한 예상 밖의 친절을 받아서 꼭 써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의 고마움을 확인하고 입구까지 스몰 토크를 이어간다. 입구를 헤맸다고 말하는 나를 위해 엘리베이터 쪽으로 날 안내한다. 사실 아까 계단으로 와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줄도 몰랐다고 말하니 두 사람이 웃는다. 제가 어디로 왔죠? 어리바리한 내 말에 웃으며 여기저기를 알려준다. 내가 감사하다고 말하면 상대들도 감사하다고 말한다. 주고받은 고마움을 풍만하게 챙겨 계단으로 내려온다.


미용실에 가면 홀로 염색을 한 흔적이나 상한 머리를 두고 날 혼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와는 다른 방향의 애정을 흠씩 느끼고 왔다. 처음 간 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온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노을을 앞에 두고 무려 포토 후기를 작성한다. 포인트가 아닌 사람에게 고마워서 후기를 작성하는 것은 처음이다. 나는 머리를 잘랐을 뿐인데 행복한 기운을 충전한 기분이다.


나가기 전에 손에 쥐어 준 쿠폰을 가방 안 쪽에 조심스레 넣고 노을을 향해 걸어간다. 다름없는 행복을 느끼면서 두 달 뒤에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를 들이밀고 잘라달라고 외치는 나를 상상한다. 어떻게 지냈느냐는 말에 덕분에 행복하게 지냈다고 말할 나를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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