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긴 글 #76 - 나무가 되는 꿈

전생에 숲에 사는 무언가였나 봐

by 생강

76.


나무 냄새를 좋아한다. 특히 원목 독서링을 코에 대고 킁킁대는 게 좋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편하게 책을 읽으려고 산 물건이다. 호두나무로 만든 독서링은 엄지손가락에 끼워 책을 펼칠 때 쓰면 아주 유용하다. 오래 쓰면 엄지손가락이 쥐가 날 것처럼 저리지만 그 정도로 열심히 읽기 전에 대부분 도착지에 당도한다. 오 분에서 십 분정도 쓰는 것 같다. 버스에서는 홀로 앉아 책을 읽을 수 있고 서 있을 땐 손잡이를 잡느라 읽지 못한다. 지하철에서는 문 옆에 서 있거나 열차의 맨 앞이나 맨 끝에 등을 기대고 서면 읽을 수 있고 앉았을 때 양 옆의 사람들에게 침범당하지 않을 때 책을 꺼내 읽을 수 있다.


손에서 나무 냄새가 나.


집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핸드크림을 진득하게 바르고 돌아오는 길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친다. 아까 읽은 부분에서 다시 시작한다. 집은 고요하고 버스나 지하철처럼 덜컹거리지도 않는다. 바깥에서와는 다른 집중력으로 책에 몰두한다. 손가락엔 독서링을 끼고 이리저리 조물조물 만진다. 독서링은 독서를 위한 물건이지만 손으로 꼭 쥐면 마치 지압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책을 읽다가 불편한 자세라서 독서링을 빼면 습관처럼 손으로 링을 쥐고 손바닥 여기저기를 지압한다. 손에 나무 냄새가 밴다. 책에서는 인쇄된 종이의 냄새가 나고 방 안에는 나무로 된 냄새가 가득 찬다.


책도 나무로 만든 것. 독서링도 나무로 만든 것.


그런 꿈을 꾼다. 나 홀로 주택에 사는데 집 한가운데에 나무가 뚫고 들어와 울창하게 자라는 모습. 나는 일층으로 내려가 물을 주고 이층으로 올라와 가지치기를 하고 옥상으로 올라가 이파리가 흔들리는 모습을 본다. 옥상엔 그늘이 번지고 나는 그 아래서 바람을 맞으며 나무 냄새를 맡는다. 어디까지 자랄지 모르는데 어디까지 자라도 좋을 만큼 나무가 좋은 꿈. 그러다 잠에서 깨면 나뭇잎이 가득한 내 방 벽지를 마주친다. 아무래도 숲에서 사는 기분이라고. 이 집에서 사는 동안 그런 생각을 한다.


벽지는 내가 골랐어. 중학생의 취향 치고는 꽤 특이하다.


어릴 때 고른 벽지가 지금의 나를 달래주다니. 가구를 나무로 된 것으로 바꾸고 야자수를 키우고 독서링을 만지작거리며 나무 냄새로 나를 달래는 일이 신기하면서도 당연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는 벽지를 고르는 것도 큰일이었다고. 나의 취향을 그대로 말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데. 혹시 거절당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게 아닌 방에서 살아야 하잖아. 그건 싫어. 그래서 고집을 부렸고, 그 고집이 아주 전에 어른이 된 나를 안아주고 살려내. 내가 나를 살리고 있지. 벽지 이후로 책을 하나 둘 모으고 원목 가구를 매일 검색하고 호두나무로 만든 독서링을 사고 이제는 나무 향이 그득한 향수를 검색하곤 한다. 취향을 드러내니 더 욕망하게 된다.


오늘도 나무가 집을 뚫는 꿈을 꿀까. 아무 꿈 없이 자는 게 가장 좋지만 때로는 나무와 숲이 나오는 꿈을 꾸면 아침이 개운하다. 언젠간 내가 나무가 되는 꿈을 꿀 것만 같다. 그땐 누가 나에게 물을 주고 햇빛의 자리에 나를 심어둘까? 그럴 때마다 나를 둘로 나눠 하나는 보슬보슬한 흙 속에 심고 싶고 다른 하나는 평생 그 나무를 보살피는 관리자로 만들고 싶다는 상상을 한다. 아마 지금은 내가 나의 취향을 다지는 게 그와 같은 과정이겠지만.


얼마나 이런 취향이 지속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젠 어떤 것을 좋아해야 할 것 같다는 불안이 아니라 좋아서 취향이 되는 일들을 갖고 싶다. 요즘은 나무를 사랑하고 있다. 싱그러움과 묵직한 향기 속에서 코를 파묻고 하루 종일 강아지처럼 킁킁대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생강 긴 글 #75 - 여섯 시 반에 예약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