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다고 말했었나
77.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던 시절을 떠올린다. 분명 널 사랑하는데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나. 아니면 널 사랑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나.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받고 싶었던 것 같다. 같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때의 기억이 흐릿하기 때문이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 그리하여 내가 잘못된 마음을 가진 게 아니라는 증명. 내겐 그것이 필요했다. 누군가 허락한 사랑만이 진짜 사랑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말하지 못한 사랑이 넘쳐난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내가 알던 세상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너를 잃기 싫은 욕심과 너와 한 꺼풀 벗겨진 세상에서 살고 싶었던 욕망. 사랑은 때로 사람을 욕심과 욕망에 가두기도 한다.
말 한마디인데, 왜 이렇게 어려울까.
말 한마디로 우리 사이는 어긋나기도 하니까. 그 정도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위태롭고 연약하고 나약하니까. 서로에 대한 양심, 일말의 죄책감, 의무감, 무언의 약속, 이제껏 이어온 우리만의 문화, 그것들을 버려야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해선 이것들을 버려야만 했고 나는 그 사이에서 항상 고민하고 갈망했다. 그러나 그 단계 너머의 일은 대부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갈망보다 안정을 택했고, 곁에 있는 것으로 합리화를 했다.
나랑 다른 마음이면 어떡해.
어떡하긴, 다른 마음인 거지. 지금에야 그런 생각을 하지만, 널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말들은 내가 겪지 못한 단계의 관계였고 나는 겪지 않은 것에 큰 두려움이 있었다. 안정된 사랑은 없는 걸까? 꼭 문턱을 넘어야만 사랑인 걸까? 마음이 가라앉을 때마다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사랑에는 보이지 않는 문턱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저걸 쉽게 넘는데 나는 왜 못하지? 관계의 발전이 무서운가? 그러나 누군갈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생기는데,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면 이건 사랑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하면서.
지금은 사랑에 많은 모양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매번 다음 단계가 두려워서 주춤해도 사랑하는 마음은 간직하고 있으니 그것 또한 사랑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것도 사랑이라 생각하고 있다. 대신 나는 두려움이 많은 사랑이어서 홀로 불태웠다가 홀로 삭히는 사람인 거지.
나의 일상과 저 사람의 일상을 파괴하고 싶지 않아서 멀리서 마음을 키우던 때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가 아주 짧은 시간만 공유한 채 서로 등을 돌렸고(사실 내가 더 느리게 등을 돌렸다. 그 사람은 아주 재빠르게 등을 돌렸고.) 어떤 사람은 나와 인사를 해도 민망한 사이여서 단번에 ‘안 되겠다. 무슨 짓을 해도 안 될 사이라는 게 딱 느껴진다.’라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에겐 마음이 간절했으나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아서 그저 그런 사건으로만 남은 사이(사이라고도 못 하겠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남으로 정정한다.)였다. 그것은 마음으로만 남은 사랑이라고, 그렇게 부르고 있다.
평화롭게 사랑하는 꿈을 꾼다. 일상과 주변이 무너지지 않는 사랑을 바라고 있다. 내가 키운 사랑들이 옹기종기 모여 나를 욕하는 상상을 한다. 우리 주인은 너무 나약하고 겁이 많아서 우리가 제자리에서 이 사람의 정신을 헤치지 않을 정도만 몸집을 키우자. 이런 말을 하면서 날 안타까워하지만 귀여워하는 상상.
사람들에겐 사랑하자고 말하면서 사랑을 두려워하는 사람. 신뢰가 떨어지는데. 저는 저만의 사랑을 할 테니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랑을 키우길 바란다고 말하는 내가 웃기면서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지난날들을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나의 마음을 들키고 그 사람이 날 미워하는 날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나의 마음을 이리저리 말하고 다니던 끔찍한 날들. 그날들을 거쳐서 지금이 됐는데, 지금의 성격이라면 그때를 더 현명하게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사랑이 무섭고, 나의 안정과 평화가 최우선이다.
그래도 여전히 누군갈 사랑하고 마음을 키운다.
조심스러운 마음이 나를 키웠으리라 생각한다. 사랑하는 행위는 나의 일이므로 안전한 사랑을 꿈꾸는 마음을 먹고 자라서 여전히 조심스러운 사람이 된 것이다. 후회하지 않는다.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으니 어찌할 수 없을 땐 피하는 사람이 된 것을, 내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다만, 허공에 사랑한다고 외쳐도 내가 만든 허공에 외치고 있다. 그 정도의 일만 가능하도록 설계된 사람 같다. 그것에 만족하고 있으니 나중에 더 바라게 되면 더 바라기로 했다. 내겐 지금이 중요하니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가끔은 그 용기의 원천을 찾고 싶지만, 불쑥 튀어나온 마음은 용기가 없어도 튀어나온다. 아주 작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나는 여전히 소심하고 작은 사랑을 품고 있지만, 내겐 이 또한 사랑이다. 사랑을 하지 않는 날과 사랑하는 날을 비교했을 때 생기 있는 쪽은 역시 사랑하는 쪽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작은 사랑을 키우며 그 사랑을 먹고 자라는 사람이 되는 중이다.
어떤 사랑을 하든 나는 나를 지킬 의무가 있다.
그 믿음을 먹고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