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도 없이 푹 자는 꿈
78.
잘 자. 어떤 이는 좋은 꿈을 꾸라고 하고 어떤 이는 꿈도 없이 푹 자라고 한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땐 전자의 의미가 ‘잘 자’의 완성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후자라고 생각한다. 꿈은 나를 피곤하게 했고, 대부분 사람에게서 도망치거나 폭발로부터 상처를 입거나 같은 장소에서 같은 복장으로 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꿈이 피곤했다.
암막 커튼을 사자.
빛을 차단시키면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꿈은 얕은 수면에서 일어나는 거잖아. 아예 꿈을 꾸지도 못하게 푹 자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창문에 암막 커튼을 달았다. 바람에도 꿈쩍 않는 묵직한 커튼. 그 어둠에 나를 맡기고 밤을 보냈다. 꿈을 꾸는 날보다 꾸지 않는 날이 많았다. 성공이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문제가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꿈을 꾸면, 점점 잠에서 깨고 있다는 신호였으므로 피곤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일어나곤 했는데 암막 커튼을 치고 자니 내가 자고 있는 이 순간이 밤인지 아침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꿈이 없으니 일어날 수 없었다.
적당한 꿈은 좋은 걸까.
가끔은 사랑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니까, 좋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꿈이 밉지 않았다. 피곤한 건 내가 고통스럽게 뛰어다니는 꿈을 꿔서 그런 거다. 매번 사랑하는 사람이, 이젠 볼 수 없는 사람이 나오면, 아침은 울음과 그리움으로 가득 찬다. 도망 다니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그러나 하루 종일 그리움에 절여진 몸으로 사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꿈이 밉지 않은데, 꿈속의 사람과 내가 섞일 수 없다는 사실이 미웠다.
꿈을 꾸지 않고 밤새 밤을 헤엄치는 것과, 꿈을 꾸고 남은 잠을 떨쳐내고 아침을 맞는 것. 무엇이 더 좋은가. 생각해보면 나는 잘 수 있어서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기에 다시 잠들 수 있는 것 같다. 그 둘을 고를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그저 잠에 들고 아침을 맞고, 그 순환 속에서 알맞은 방법을 찾아야 하는 존재일 뿐. 그러다 늦잠도 자고, 꿈도 꾸고, 피곤하게 아침도 맞는 것 아니겠나. 그런 생각에 다다르자 꿈과 밤과 아침이 모두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암막 커튼은 빛과 함께 꿈도 흡수해버렸다고 하자. 그는 그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다.
두 가지를 두고 고민하는 것은, 내가 그 두 가지 일을 모두 경험하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꿈을 꿀 것인가, 꾸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예방(암막 커튼)이나 부질없는 선택, 이를 테면 '오늘은 꿈도 꾸지 않고 푹 자야지.' 같은 부질없는 다짐(선택해봤자 스트레스를 받은 날엔 악몽을 꾸기 때문에)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피곤한 건 내가 아침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고, 꿈을 꾸는 건 아침의 신호를 받고 몸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꿈에 대한 생각을 조각내서 들여다보니 결국 종착지는 존재의 감사함이었다. 볼 수 없는 사람을 꿈에서라도 볼 수 있는 위치에서, 그런 존재로, 피곤하다고 말하는 것이 어느새 민망해졌다.
오늘은 꿈도 없이 푹 잤으면 좋겠다. 또다시 부질없는 다짐을 한다. 그래도 언제나 내 꿈의 통로는 열려있다. 악몽도 꿈이라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신호지만 꿈을 꿔야만 한다면 대체로 행복한 기운이 가득한 꿈을 꾸고 싶다.
잘 자. 일어날 수 있음에 감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