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주택살이를 하게 되고 영주에 정착하게 된 이야기를 하자면 남편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남편과 나는 교대 동기 커플로 약 8년여 정도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그런데, 나는 대구광역시 교원 임용시험을 쳐서 합격했고, 남편은 경상북도 교원 임용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다. 이것이 바로 모든 문제의 씨앗이었다. 그 후 우리는 어디에 살지를 두고 늘 다투며 밀당을 했다. 웬만한 싸움 거리는 마지막에 가서는 모두 그 문제로 끝이 났다. 어쨌든, 결혼 후 나의 직장 근처 대구에 신혼집을 구했고 남편은 구미로 장거리 출퇴근을 하였다.
신혼집은 그간 모은 약간의 결혼 자금과 대출로 마련한 16평 아파트 전셋집이었다. 졸업 후 발령을 받고 3년 정도 돈을 조금 모았으나 가난한 부모님께 어느 정도 보내고 결혼 준비에 쓰고 나니 얼마 남지 않았다. 남편은 군대를 다녀오고 발령을 받았으니 모은 돈이 거의 없었다. 둘 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 딸이다 보니 부모의 도움은 아예 처음부터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출로 마련한 작은 16평 전셋집이었지만, 평생 내 공간을 가져 보지 못한 나로서는 꿈같은 공간이었다. 거실겸용 큰방과 작은 방 하나로 구성 된 아파트였는데, 때로 작은 방에서 조용히 혼자 잠들 수 있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 보는 평화로움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내의 주방에서 요리를 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화장실을 가졌다. 작은 식탁과 의자가 있고 커튼과 침대가 있는 작은 아파트는 안락함 그 자체였다.
방 2칸짜리 촌집에서 오 남매의 맏이로 살던 나는 내 방은 꿈도 꾸지 못했고, 대학 시절 기숙사를 거쳐 자취할 때도 늘 친구들과 함께였다. 우리는 방값을 아끼기 위해 5명의 친구들이 방 2개에 좁은 부엌이 딸린 방을 구해 함께 살았다. 좋은 점도 있었겠지만, 생활 습관의 차이로 불편한 점도 참 많았다. 하지만, 서로가 불편을 참고 참으며 대학 시절을 함께 보냈다.
졸업 후 발령을 받고 자취할 때는 좁은 부엌이 딸린 방 하나에서 동생과 사촌동생을 데리고 3명이 함께 살았다.
“너 참 단순하구나! 그래서 난 네가 좋다. 데리고 같이 살기 딱 좋다.”
대출을 2000만 원이나 낀 3000만 원짜리 코딱지만 한 전셋집에 날마다 너무 행복해하니 남편이 한 말이다. 모아 놓은 돈도 없고, 번듯한 집도 마련해 줄 수 없던 남편이 ‘투덜대지 않아서 고맙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하곤 했다.
그때도 결혼하는 대학 동기들은 20평 아파트 30평 아파트를 분양받아 결혼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대구의 집에서 다니는 친구들은 오롯이 자신의 월급을 모을 수 있지만, 시골에서 도시로 온 우리는 자취방 월세도 내고 생활비도 써야 해서 모을 돈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우리 집은 가난한 형편에 동생들이 줄줄이 학교를 가야 하니 집에도 돈을 좀 보태야 했다.
작지만 안락한 첫 신혼집에서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였다. 갑자기 남편이 더 이상 장거리 출퇴근을 못하겠다고 선언을 하였다.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도 있지만, 교육 운동을 하는 교사로서 그 지역의 교사가 되지 못하고 대구에서 출퇴근하는 교사로는 도저히 못 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경북 지역으로 가자고 하였다. 남편은 당장, 고향이 가까운 영주로 관외 전보를 신청하겠다고 했다.
나는 한 해만 참아 달라고 부탁했다. 임신 중인 둘째가 태어나고 다음 해에 육아휴직을 해서 갈 테니 올해는 참고 내년에 신청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신청을 한다고 바로 발령 나기는 힘들기 때문에 올해 신청을 해야 내년에라도 갈 수 있는 확률이 있다며 남편이 고집을 피웠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했다.
그런데 바로 남편이 경북 영주로 발령이 났다. 나는 절망했다. 대구에 친정도 시댁도 아무도 없는데, 직장을 다니며 임신 7개월의 몸으로 네 살짜리 첫 아이 육아를 혼자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갑자기 진통이 오고 출산이라도 하면 보호자도 없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갑자기 병원에 가면 첫아이는 어디에 맡겨야 하는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남편은 너무 미안해했지만, 발령장 한 장으로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었기에 영주에 집을 구하고 근무 준비를 했다. 이동 준비로 바쁜 남편 옆에서 나는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아이 딸린 임신 7개월의 워킹맘이던 나는 결국 주말 부부가 되고 말았다. 대구에 계신 나의 외할머니(아이에게는 증조모)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 직장을 다녔다. 고맙게도 우리 둘째는 남편이 와 있는 날을 택해 세상에 태어났다. 네 살짜리와 신생아를 데리고 그 해는 혼자 육아를 하며 대구에 살았고, 이듬해 휴직을 하고 남편을 따라 영주에 왔다. 육아휴직이 끝나고는 파견 근무를 신청해 나도 영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근무를 했다.
사연을 말하자면 사실 긴 이야기이다. 공적인 지면에 내가 아닌 타인의 개인사를 들먹거릴 수 없으니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영주에서는 지인의 19평 아파트에서 전세를 살게 되었는데, 2년 뒤, 집을 소유할 수 없게 된 지인에게서 전세금도 돌려받지 못한 채, 집도 비워주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전세금 4천만 원, 그 돈은 아이 둘을 키우며 맞벌이로 대출금을 갚아가며 힘들게 모은 우리의 전 재산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전 재산이었던 전세금도 돌려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