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낡았지만 소중한 기억을 꼭꼭 채워준 고마운 집
지인에게서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전세금 4000만 원은 아이 둘을 키우며 맞벌이로 대출금을 갚아가며 모은 우리의 전재산이었다. 돈도 없이 쫓겨난 우리는 갈 곳이 없었다. 그때, 남편이 근무하던 학교에 딸린 관사가 오랫동안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관사는 학교 근처 어수선한 구도심에 있었다. 아무도 살지 않은 채, 몇 년째 빈집으로 방치된 집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을 데리고 길바닥에 나 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갈 곳은 거기밖에 없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빈집이고 뭐고 간에, 갈 곳이 있어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 판이었다.
전세금 이야기를 덧붙이면, 2년의 파견 기간이 끝나고 대구로 복귀할 때, 전부를 돌려받진 못했지만 다행히 어느 정도의 돈을 돌려받았다.
갈 곳 없는 우리를 받아준 고마운 관사는 작은 도심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150평의 대지와 약 16평 정도의 작은 건물로 된 낡은 집이었다. 이 집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길을 지나던 할머니들이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들른 적이 있었다.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할머니 두 분이 옛날 생각이 나서 그런다며 잠시 들어가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곤 들어오셨다. 할머니들은 옛 추억을 떠올리며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두 분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셨다. 할머니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예전에도 학교에 딸린 관사였다. 할머니들이 기억하는 건물은 일본식 건물이었다고 했으니 이 건물은 아마 그 이후 다시 지어졌을 것이다. 텔레비전 유선을 연결하러 오신 작업자 분이 작업을 하시면서 혹시 학교 사택이냐고 물으신 적도 있었다. 그분 말씀에 따르면 7-80년대에 지어진 학교 사택들이 다 이런 형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분의 말씀을 믿어보자면 이 집은 1970년대, 혹은 1980년대에 지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이 된다.
몇 년간 인적 없이 빈집으로 방치된 낡은 관사에 처음 갔을 때가 생각난다. 내 키를 훌쩍 넘는 마른 풀이 마당에 가득 차 있었다. 건물의 흰색 페인트칠이 벗겨져 콘크리트가 흉하게 드러나 있었다. 현관이 없었으며 현관문 역할을 할 거실 새시창은 못을 꽂아서 잠금장치를 대신했다. 건물 앞에는 비를 맞아 불어 터지고 썩어빠진 의자나 책상 같은 것들과 고무 화분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고장 난 채 버려진 세탁기 한 대도 햇빛에 삭을 대로 삭은 채로 뒹굴고 있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폐허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폐허 같은 마당 위로 푸른 하늘이 한 아름 안겨 왔고, 이른 봄날의 너그럽고 따뜻한 햇살이 마당에 가득했다.
마당 중앙에 자리한 보도블록 위에 돗자리를 깔고 들판에 소풍 나온 기분으로 짐을 펼쳤다. 아이들을 앉혀 놓고, 남편과 나는 마당의 마른 풀들을 걷어내고 집 외벽과 유리창에 물을 뿌려 청소했다. 집 안 곳곳도 깨끗하게 청소했다.
집은 작은 방 2개와 작은 주방 1개, 욕실 1개, 그리고 각 실들의 통로 역할이던 작은 거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실 창 앞에 새시 문도 하나 더 추가로 설치하고 보일러와 싱크대 수리를 마친 다음 이사를 했다. 이사하던 날, 어쩌면 당연했을 사태가 벌어졌다. 공간자체가 작고, 수납공간도 전혀 없던, 아파트의 발코니 같은 공간조차 없던 작은 집에는 우리가 갖고 있던 짐들이 다 들어가지 못했다. 장롱이며 서랍장이며 책장이며 아이들 옷가지며 많은 짐들을 억지로 구겨 놓고도 약 한 달 동안이나 전쟁통의 피난민처럼 마당에 갖가지 짐들을 널브러 놓고 생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버릴 것은 버리고 살림 다이어트를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