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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새올 May 23. 2024

11화 뱅크시는 아니지만 오늘은 그래피티 화가

낙서와 예술의 경계 그래피티 - 낡은 벽을 도화지 삼다.

  

 ‘엄마 벽에 그림 그려도 돼?’

 뜬금없는 딸의 물음에 나는 우리 집 벽을 자세히 보았다. 집의 앞면을 보면 붉은 벽돌과 흰색 페인트 도장으로 마감이 된 집인데, 옆면을 보면 그냥 콘크리트 벽이나 마찬가지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이 벗겨져 얼핏 보면 애초부터 콘크리트 벽인 것 같았다. 아래쪽으로 흰색의 흔적만 희뿌옇게 남아있었다.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듯 벗겨졌다면 참으로 보기 흉했을 텐데, 다행히 세월의 흔적을 품고 곱게 나이 든 인정 많은 노인의 은발처럼 차분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도 낡아서 뭘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수채 물감이야 비가 오면 씻겨 나갈 것 같아서 허락을 했다. 두 아이가 신이 나서 벽에 그림을 그리며 그래피티 화가 놀이를 했다. 그림인지 낙서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그림들이 벽에 가득 그려졌다. 


사회적 문제의식은 하나도 안 들어 있는 그래피티 작품


열심히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작가님들



 

 요즘은 공공미술의 형태로 그래피티를 허용하는 거리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피티는 원래 불법 낙서의 형태로 허락 없이 건물이나 거리에 그려지던 게릴라 아트이다. 그래피티의 장소는 주로 폐허 속 건물이나 베를린 장벽 같은 의미 있는 곳에서 많이 그려졌고 그래피티 자체가 재물손괴죄나 건조물 침입죄가 성립될 수 있는 불법 낙서의 형태이기에 저항 정신이나 강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집 벽은 그래피티가 딱 어울리는 폐허 같은 빈벽인데, 사회적 문제의식이나 풍자 같은 것은 하나도 안 담겨 있고, 동산 위의 해님도 있고, 꽃도 있고, 미사일처럼 생긴 물건도 보이고(4살짜리 아들의 말로는 기차라고 함) 초록색선으로 그어진 포클레인도 보인다. 그야말로 아이들의 세계이다. 불법은 아니지만, 낙서인지 그림인지 모르겠다는 지점에서는 그래피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나라도 벽에 뱅크시를 따라 해서라도 그럴듯한 그래피티 작품을 하나 남겨 볼 걸 그랬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나는 열심히 카메라 셔터만 눌러 댄 것이 지금에 와서 보니 살짝 아쉽다. 벽만 보면 그야말로 뱅크시의 작품이 딱 어울릴 만한 낡은 콘크리트 벽이다. 어쩌면 저 벽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그림도 있을 텐데.       

뱅크시의 그래피티 작품 - 눈을 받아먹는 아이의 천진한 모습이 그려져 있지만, 옆면의 벽과 연결하여 보면 공장에서 날아는 재를 받아먹는 모습이다. 

 

새것만 좋은 것은 아니야! 


 때로는 낡은 것 오래된 것이 더 좋을 때가 있다. 겉보기에는 예쁘지 않지만, 낡았기에 더 편안하고 오래되었기에 더 정감 가는 것도 세상에는 참 많은 것 같다. 우리 집도 그랬다. 우리 집 빈 벽은 폐허처럼 낡은 벽이었지만, 도화지가 되어 주었고, 덕분에 우리는 어디에서도 하지 못할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 하나를 우리는 선물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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