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기억나는 일 중에는, 닭과 토끼를 길렀던 일이 있다. 시골집에서 아이들 보여주겠다고 남편이 데려온 병아리가 시작이었다. 토끼는 직장 동료가 키우던 토끼를 받았다. 처음에는 잔디마당 한 켠에 철망과 나무로 작은 토끼장과 닭장을 만들어 두었으나 이내 얼마 안 있어 확장 이전을 했다. 남편이 데려온 병아리가 순식간에 닭이 되었기 때문이다. 금세 그렇게 닭이 될 줄이야. 겉모습은 닭이었는데, 울음소리는 삐약삐약 거리는 것이 사람으로 치면 딱 초등학생 정도라 생각된다. 어쨌든 노르스름한 병아리가 아니라 어엿한 닭의 모습을 갖추어 가니 하루라도 빨리 널찍한 집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토끼장도 함께 이전을 하여 텃밭의 딸기를 캐내고 딸기밭 한쪽에 넓게 터를 잡고 사육장을 만들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주택가 한가운데에서 닭을 키우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철이 없었고 이웃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새벽마다 닭 울음소리를 참아 준 이웃들께 너무 너무 미안하고 고맙다. 조금 더 철이 들었더라면 마당에 닭을 키우진 않았을 것이다. 그땐 그런 것을 잘 몰랐다. 그냥 병아리를 데려왔으니 키웠을 뿐이었다.
닭장 만들기와 닭 키우기
근처 목재상에서 필요한 각목을 좀 사고 마당에 깔고 남은 피죽을 주로 사용했다. 철망은 철물점에서 구입했다. 주말 아침 남편과 함께 못과 망치를 들고 닭장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구경을 나왔다. 대강 형태를 만들고 닭을 안에 풀어 주고 마무리는 못한 상태에서 여전히 바쁜 남편이 출타를 했다.
닭을 닭장에 풀어주고 처음엔 닭들이 푸드덕거리니 아이들이 움찔하며 무서워했다. 그런데 아빠가 들어가는 걸 자세히 살펴본 둘째 아이가 아빠가 출타하고 나니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살짝 닭장에 들어가 보는 것이었다. 막상 들어가니, 닭들이 구석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그걸 보고 완전 자신감 충전되어 문을 열고 제 집처럼 들락날락거렸다. 닭장인지 민재 집인지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우스웠고, 첫째인 딸은 불만이었다. 둘째 아이는 아빠 흉내를 내며 열심히 닭장을 들락거렸다. 공사도 해보고 철거도 해보고. 닭장 안에 나무토막 몇 개를 이런저런 모양으로 걸쳤다가 나무토막을 들어내어 보도블록 길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쳤다. 보도블록 위로 떨어지는 나무토막소리들이 얼마나 경쾌한지 볼링장에서 스트라이크 치는 소리 같았다. 그 소리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아직까지도 그 생각만 하면 귀에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이 생생하다.
보다 못한 딸이 한 마디 했다.
“민재야 그만해! 병아리들이 싫어하거든.”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공사 중인 동생을 보고는 딸이 한마디 더 했다.
“민재야 그만해! 네가 아무리 그래도 아빠처럼 안 멋있거든!”
꼬맹이들 눈에도 일하는 아빠는 멋있어 보였나 보다. 텔레비전만 보고 잠만 자던 게으른 아빠는 닭장 덕분에 완전 멋있는 아빠로 변신해 있었다. 다음 날, 지붕도 만들고 횃대도 만들고 둥지도 만들어 주었다.
우리 집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음식물 찌꺼기들은 닭들에게 훌륭한 먹이가 되었다. 남은 밥알들, 채소 다듬은 찌꺼기, 멸치 대가리 생선 찌꺼기, 게딱지, 달걀 껍데기들 처리가 곤란한 것들까지 닭들은 맛있게 먹어 주었다. 그중에 제일 좋아하는 것은 신기하게도 달걀 껍데기이었다. 친환경 생태계를 그대로 직접 느낄 수 있다. 그 당시에 나는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거름 중에 제일 최고의 거름은 닭똥이 아닌가? 요즘 나는 압축계분을 사서 화분과 텃밭의 거름으로 잘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남은 음식물들을 말끔히 먹어 주고 고맙게도 알까지 꼬박꼬박 낳아주었다. 시판 사료를 많이 안 먹이니 매일 낳지는 않았지만, 우리 가족이 먹기에는 충분했다. 닭 둥지에 곱게 놓여 있는 달걀은 볼 때마다 너무 신비로웠다. 수많은 탄생신화에서 왜 알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지 알 것 같은 순간이었다.
한 번은 시골 시댁에 다녀오고 나니 닭이 없어졌다. 어디 갔을까? 고양이가 물어갔나? 별 생각을 다 하던 차에 옆집 할머니가 부르셨다. 닭이 날아 나와서 집 마당에 묶어 두었으니 찾아가라는 것이다. 온 동네 날아다니는 닭을 잡아서 발목에 끈을 묶어 나무에 매어 두셨던 것이다.
우리 닭들은 호텔만큼이나 널찍한 우리 집 닭장에서 알도 꼬박꼬박 낳아주고 각종 채소 다듬은 찌꺼기며 멸치 대가리와 생선 찌꺼기, 달걀 껍데기, 남은 밥알들을 맛있게 먹어 주며 우리와 함께 즐겁게 잘 지냈다.
토끼 까망이 이야기 - 까망이 수술사건
직장 동료가 키우던 토끼가 있었는데, 키우기 곤란하다며 주택에 사는 나에게 주겠다 하길래, 얼른 데려왔다. 목덜미에 흰색 목도리를 두른 듯한 무늬가 있는 까만 토끼였다. 이름을 까망이라고 지어 주었다. 남편과 나는 나무 각재와 철망으로 토끼장을 만들었고 잔디 마당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나중에는 닭과 함께 대문 옆 사육장에서 키웠다. 아이들은 학교 갔다 오면 마당의 풀을 뜯어 토끼에게 먹이를 주었다. 그리고 가끔 당근이나 고구마등도 주었다. 이야기나 애니메이션등에서 토끼 하면 연상되는 먹이는 당근이다. 내가 키워 본 바에 따르면 당근이 토끼가 제일 좋아하는 먹이는 아니다. 당근도 먹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최애 먹이는 아니었다. 풀을 훨씬 더 좋아한다. 어느 날 첫째 아이가 말했다.
“엄마, 토끼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약간 쓴 맛이 있는 풀이야. 민들레 잎이나 상추를 가장 좋아해! 당근을 제일 좋아하는 게 아니야.”
토끼에게 자주 먹이를 주던 딸의 발견이었다.
까망이는 자주 마당에 풀어 주어 아이들과 같이 뛰어놀다가 다시 토끼장에 넣어 주곤 했다.
“엄마, 까망이가 또 땅 팠어.”
‘쇼생크 탈출’인가? 풀어 줄 때마다 한쪽 구석에 가서 땅을 파던 까망이의 계획은 딸이 가끔 걱정했지만 늘 실패였다. 마당에 풀어 줄 때마다 구석에 가서 땅을 파던 까망이의 동그란 궁뎅이에 대고 ‘야 네가 아무리 파도 나갈 데도 없거든. 여기서 나가 봐야 이 근처에서 우리 집만큼 네가 살기 좋은 곳도 없으니까 아예 탈출할 생각을 말아라’라며 훈수를 두곤 했다.
어느 날 딸이 울며 집으로 들어왔다. 까망이가 아픈 것 같다는 것이다. 가 보니 턱 아래 아주 커다란 혹이 생겨 있었다. 애견 센터는 하나 있었지만, 토끼를 봐주는 병원이 없었고, 또 동물 병원이 있더라도 소 등의 가축을 위주로 보는 병원들이라 진료를 받을 곳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혹은 점점 커지고 아래쪽이 급기야 갈색으로 변하며 갈라지기도 했다. 딸은 토끼를 볼 때마다 눈물 바람이었다.
시내에 동물 약국이 있다는 것을 알고 상담을 받으러 갔더니 가게 주인이 작은 수술용 칼 하나와 연고를 주었다. 토끼를 작은 케이지 안에 넣었다. 받아 온 얇은 장갑을 끼고 문으로 손을 넣어 혹을 만지니 까망이가 가만히 있었다. 몇 번을 주저한 끝에 받은 수술칼 끝으로 살짝 찔렀더니 하얀색 크림 같은 것이 계속 나왔다. 도저히 더는 칼을 못 대고, 손으로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짜 준 뒤에 토끼장에 넣었다. 우리는 이 일을 까망이 수술 사건이라 부른다. 다행히 염증이 잘 아물어서 우리가 헤어질 때까지는 별 탈 없이 잘 지냈다.
그 작은 집에 살던 동안 내 머릿속에 잘 저장된 풍경 하나가 있다. 작은 주방 안에 겨우 자리를 마련한 식탁 옆 유리창을 붙잡고 자라던 담쟁이 줄기 하나가 만드는 풍경이었다. 액자 같은 작은 유리창에 매번 아침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마다 꽃 한 송이를 선물 받는 기분이었다. 그 작은 담쟁이덩굴 싹 하나가 계절을 다 담고 있었다. 연둣빛 싹으로 시작해서 가을단풍, 생각 많은 듯한 스산한 겨울 풍경까지.
그 작은 집에서 이름을 지어 주지 못한 닭들과 까망이와 우리는 아주 잘 놀았고, 직장 파견 기간이 끝난 나는 남편과 닭과 까망이를 남겨 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대구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넓은 마당을 가진 작고 낡은 집에서의 많은 추억을 뒤로하고 대구의 아파트로 다시 돌아오던 날, 그날부터 주택 앓이가 시작되었다. 마당과 정원이 너무 갖고 싶어 주말마다 땅을 찾아다니고 집짓기 책을 사서 읽으며 긴 시간 동안 주택 앓이를 하게 되었다.